마지막에 계셨던 병원에 있는 장례식장에 빈소를 마련했다. 모든 절차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장례식장 측의 사정으로 빈소 옆 식당을 사용할 수 없어 다른 건물에 있는 식당을 이용해야 했다. 지하에 있는 빈소에서 올라가서 다시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가는 일을 수 없이 반복해야 했다. 엄마가 개량한복 상복을 입어야겠다고 해서 겨울용 상복을 입었다. 여름용 개량 한복이 없었다. 그 와중에 나는 생리 중이었다. 더웠고 찝찝했고 아팠고 힘들었다. 3일의 장례식이 30일처럼 느껴졌다.
하아... 빨리 집에 가고 싶다...
2006년 아빠는 폐암 선고를 받았다. 1년 가까이 매일 기침을 해 동네 병원을 전전했지만 잘 낫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간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을 들었고 대학 병원에서 폐암이라고 했다. 암이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고 1기 정도 된다고 했다. 수술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엄마가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자고 했지만 아빠는 부산에서 수술을 받고 싶다고 했다. 수술 중에 검사에서 보이지 않았던 암이 발견되었고 수술로 다 제거할 수 없었다고 했다.
평소에도 부지런했던 아빠는 퇴원하자마자 일을 하러 갔다. 암환자라면 해야 하는 식단 등의 관리는 전혀 하지 않은 채 (아! 술, 담배는 끊으셨지.)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도 일을 했다.
"아빠! 일 하지 말고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가서 좋은 음식 먹고 운동하면서 아빠 암 치료에만 신경 써. 내가 옆에서 도울게"
라는 말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대학에 들어가 2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엄마는 전업주부였다. 언니는 이른 결혼과 출산으로 어린 조카를 돌보고 있었고 남동생은 고등학생이었다.
당시로부터 몇 년 전 2.5톤 폐유수거 탱크로리 한 대를 마련해 1인 사업을 시작했던 아빠가 고정적인 거래처들을 확보하고 월 천만 원 순수익을 달성한 해였다. (다른 가족들의 생각은 알 수 없으나)나는 우리 가족이 아빠의 경제력을 포기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현실을 외면했다.
몸속에 있는 암과 싸우며 일을 하던 아빠는 2년 정도 후에 체력적 한계에 부딪혔고 나에게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아빠가 아프기 전에 나에게 탱크로리 운전을 가르쳐 주었다. 아빠가 술을 마신 날 대리 운전을 하고 용돈을 받았다. 건축설계사무실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사직을 하고 아빠 일을 도왔다.
함께 일 한지 일 년 후 아빠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집에 있던 아빠의 병세는 빠르게 깊어졌다.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까지 했지만 암세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진통제를 먹으며 고통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진통제의 수와 강도가 점점 늘어나던 어느 날 아빠는 우리가 알던 아빠가 아니었다. 살은 모조리 빠져 뼈와 가죽만 남았고 가족들도 못 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는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했고 엄마가 대소변도 받아야 했다.
몸을 움직일 수 있었던 때의 아빠는 약 때문인지 이상해졌다. (마약성 진통제 최대 용량을 사용 중이었다.) TV에서나 보던 마약중독자들처럼 환청을 듣고 환각도 보는 듯했다. 소리도 지르고 난폭해졌다. 아빠 눈은 텅 비어있었다.집에 들어가기가 너무 싫었다.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잘하지도 않던 기도를 했다.
하나님, 아빠가 저렇게 살아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아빠 너무 아프고 보는 우리도 너무 힘들어요. 낫게 해 주실 거 아니면 그냥 데려가 주세요. 아빠도 그걸 원하지 않으실까요?
아빠가 원할 거라는 건 내 마음 편하자고 한 생각이다. 아빠가 죽음을 원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원하고 있었다. 아빠를 위한다는 가식으로 포장해서. 그 포장지 안에는 이기적이고 추악하고 끔찍한 생각이 있었다.
부녀간에 깊은 사랑은 없었지만 무정하지도 않았다. 아빠를 깊이 사랑하지 않아서인가? 아님 나는 생명의 존엄성이라곤 모르는 사이코패스인가? 아무리 힘들어도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다른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난 악한 인간인가? 나의 이런 생각들은 용서받을 수 있을까?
낮에는 아빠의 죽음을 기도하고 밤에는 죄책감에 눈물 흘리는 나날이었다.
일을 그만 둔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아빠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빠 나이 55세였다.
장례식에서 눈물이 나지 않았다. 늘 아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동안 많이 울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장례식의 여러 가지 불편했던 환경들과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느라 내 마음이 어떤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화장을 하고 한 줌의 가루가 된 아빠를 추모공원에 혼자 두고 집으로 오자 슬픔이 밀려왔다.
아빠 몸을 생각해 일을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고 병세가 깊어진 아빠의 죽음을 바라고 장례식장에서조차 불평불만만 한 내가 너무 싫었다.
8월이 되면 유독 기분이 가라앉고 우울해진다.
아빠를 좀 더 깊이 사랑하지 못해서 생전에 감사함과 미안함을 표현하지 못해서 아빠의 고통을 외면해서 지금도 슬프고 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