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리더들 필독
평범한 독일 사람들의 일상에서 입는 옷에는 '패션(Fashion)'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빠숑이라는 말에는 무언가 자기표현, 개성, 메시지, 유행 따위의 의미들이 담겨있어야 할 것 같지만 그들에게 '일상복'은 그냥 '옷'이다.
'체온을 유지하고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몸에 걸치는 것'
유행은 또 돌고 돌아 지금은 오히려 샌들 + 양말 조합으로 멋을 낼 줄 아는 사람들이 어디서 옷 좀 입는다는 소리를 듣겠지만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샌들에 양말을 신는다는 것은 거의 미친 짓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패션을 '독일 아저씨 패션'이라고 부른 이유는 모두가 거의 혐오에 가까운 시선을 보낼 때부터 지금까지 독일 아저씨들은 늘 변함없이 샌들에도 양말을 신어왔기 때문이다. 양말은 발을 보호하고, 땀을 흡수하며, 무엇보다 체온 유지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샌들을 신던 운동화를 신던 흙밭을 밟던 벗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마 독일의 젊은 세대들과 자주 어울리는 사람이라나 "어? 내 주위에 독일 애들 옷 겁나 잘 입는데?!"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필자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패션 센스가 있느냐', '누가 더 옷을 잘 입느냐'하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독일중에서도 예술의 도시, 세계적인 패션 위크(Berlin Fashion Week)도 주최하는 베를린이라면 더욱이 그렇겠지만 개인의 패션 센스에 대해 논하자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미학(美學)적 철학적 질문에 도달해야 하니 그것은 번외로 하자.
https://fashionweek.berlin/
독일인이 일상복을 막 입는 이유
1. 날씨
보통 안 좋은 날씨, 일조량이 적고 비가 많이 오는 날씨를 말하면 런던을 대표적으로 이야기하지만, 런던의 날씨는 다른 유럽을 날씨에 비하면 양반이다. 적어도 내 경험은 그렇다.
독일 함부르크(Hamburg)에서 처음 독일 사람들의 옷을 보며 들었던 생각은 '사람들은 왜 다 바람막이 방수잠바같은 걸 입고 다닐까?'였다. 등산이나 조깅을 할 때 입는 얇은 방수잠바 또는 그런 느낌의 재킷을 많이 입는 이유는 조금 살다 보니 금방 알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외출을 할 때는 분명히 맑고 화창한 날씨였는데 예고도 없이 비가 오고 날이 깜깜해지는 날이 많다. 혹은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고 하던가. 해는 그대로 있는데 비가 오는 날도 많고. 아니면 비가 오기 오는데 '비가 내린다'기 보다 비가 공기 중에 떠 있는 정도의 날씨가 많다. 예측이 힘들고 애매한 날씨에는 역시 급하게 입고 벗을 수 있는 바람막이 잠바같은 것이 딱 아닌가.
이런 날씨는 안경 대신 렌즈를 끼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독일 사람들은 출퇴근을 할 때나 일상에서의 이동 수단으로 자전거를 많이 타는데 애매하게 비가 오는 날씨에는 안경이 여간 거스르는 게 아니다. 걸어갈 때는 그냥 안개가 낀 것 같은 날씨더라도 안경을 끼고 자저거를 타면 안경알은 금방 물이 찬다. 두 손은 핸들을 잡고 차동차처럼 와이퍼도 없으니 결국 자전거를 위해 콘택트렌즈로 갈아타는 경우가 많다.
2. 인도(人道)
한국의 길은 독일에 비하면 상태가 매우 좋다. 심지어 수년 전에는 서울을 하이힐 신기 좋은 길로 만든다고 시(市)에서 지하철에 광고까지 붙어있는 것을 봤다.
https://www.hankyung.com/article/2007121769351
하지만 독일의 길들은 야생이다. 때로는 산에서 막 주워온 돌들을 마구잡이로 깔아 놓은 것처럼 울퉁불퉁하고, 깨져있고, 비어있다. 때로는 흙바닥이고 때로는 나무뿌리가 지면을 밀고 나와 등산로인지 보행자를 위한 인도 인지 알 수가 없다.
만약 하이힐을 신고 생활을 하기에는 매우 불편한 조건이다. 그래서 독일은 동네에서 하이힐을 신고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보기 매우 힘들다.
3. 나보다 더 막 입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의 출근시간에는 양복이나 정장을 차려입고 구두나 하이힐을 쉽게 볼 수 있다. 꼭 출근시간이 아니어도 대중교통이나 시내를 걸으면 다들 잘 차려입고 다니다. 화려하지 않더라도 깔끔하게 하고 다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독일은 아니다. 매일 샤워를 하지 않는 사람도 많고, 매일 옷을 갈아입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꼭 돈이 없거나 노숙자여서가 아니라 돈 잘 벌고 말짱한 사람 중에도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몇 십 년도 더 돼서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를 입는다. 엄지발가락 관절 부분에 구멍이 날 때까지 신발을 신는다. 이런 사람들이 길에 즐비한데 오히려 나만 잘 꾸미고 다니기가 때로는 더 이상해 보일 때도 있다. 누가 봐도 관광객 같은 느낌, 누가 봐도 이방인 같은 느낌이랄까.
한 남자가 있다. 머리는 이틀 동안 안 감았고, 후줄근하고 좀 때가 탄 체크무늬 남방을 입었다. 안에는 며칠 입은 것 같은 티셔츠를 입고 있고, 10년도 넘게 된 반바지를 입었다. 찍찍이에 실밥이 튀어나온 오래된 샌들 그리고 밤색 양말을 신은 아저씨다.
만약 한국 지하철에 있다면 아마 다들 슬금슬금 거리를 두겠지만 여기선 내 양 옆에 그런 식으로 옷을 입은 사람이 앉아 있어도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 한국 사람 기준에서 좀 편하게 대충 입어도 자동으로 깔끔하게 잘 입은 축에 든다.
4. 사실 독일 사람들은 패션에 진심이다.
'독일 사우나', '독일의 나체 해변'. 독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들어봤을 만한 이야기다. 모든 사우나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독일의 사우나는 남녀구분이 없다. 그냥 알몸으로 남녀가 한방에 들어가 땀을 흘린다. 굳이 나체 해변이 아니어도 날씨가 좋으면 해변에서 풀밭에서 혹은 자기 집 정원에서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누워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것을 '독일은 성(性)에 굉장히 개방적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포인트를 빗나간 것이다. 왜냐하면 사우나에서 혹은 날씨 좋은 날 해변에서 나체의 인간을 보고 성(性)을 연상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냥 아무 느낌이 없다.
그곳에서 옷을 벗은 것은 옷을 입은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복장이기 때문이다.
독일 사람들은 그 상황에 맞는 복장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주로 몸으로 하는 일을 할 때는 누가 봐도 작업복이구나 하는 옷을 입는다. 그 옷으로 아예 출퇴근을 하는 경우도 많다. 직업별 종류별로 다양하고 많은 경우 마치 일부러 더럽혔나 싶을 정도로 더럽게 입고 다닌다. 옷에 내가 오늘 하는 일이 보이는 것이다.
일을 할 때뿐이 아니다. 평소에는 위에 언급한 대로 대충 추리하게 입고 다니던 사람도 파티에 초대되어 간다면 한껏 멋을 부리고 간다. 여자들의 경우 파티의 종류에 따라 한국에서는 잘 안 입는 드레스도 입고 연예인 레드 카페 밟는 패션도 서슴지 않는다. 등산할 때 등산복, 자전거, 클라이밍 등등 어떤 취미를 해도 소위 장비빨이라고 해야 하나. 그 상황에 맞는 의복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결혼식인지, 장례식인지, 할로윈인지, 친목 모임인지, 비즈니스인지 또는 나이대 심지어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 거의 정해지다 싶은 룰들이 있다. '독일사람들은 옷에 신경 안 쓴다'라는 말은 일상복에는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일상이 아닌 곳 혹은 아닌 때가 되면 오히려 한국보다 더 강하게 신경을 쓴다. 그리고 그것을 즐긴다.
늘 깔끔하게 그리고 유행에 민감하게 맞춰 입는 한국.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억압이 되기도 한다. 그 반발로 때와 장소에 맞는 옷을 입기 싫어질 때도 있다. 어찌 보면 일상에서 꾸미는 것에 비해 상황별로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는 것이 특징인 것 같다. 늘 잘 차려입지만 비슷한.
독일은 평소에는 과장 좀 해서 거지같이 하고 다녀도 때에 맞춰 드레스 코드를 갖추며 그 시간을 즐기는 문화. 꾸밀 때는 유치할 정도로 꾸미고 벗을 때는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벗는 것이 당연한.
당신의 선택은?
image : https://www.blachreport.de/business/44965-infront-germany-vermarktet-die-mercedes-benz-fashion-wee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