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책방이라는 약방에서

by 마혜경





책이 벽을 품다 ⓒ마혜경



생각이 흔들릴 때마다 자주 책방에 간다. 읽지 못한 책들이 책상 위에 쌓여도, 읽다만 책이 잠시 책꽂이로 돌아가도 생각들이 서로 충돌해 흔들릴 때마다 열두 시 마법에 걸린 신데렐라처럼 나는 자주 책방에 간다. 특히 비 오는 날 책방에 간다면 근사한 숍에서 딱 맞는 유리구두를 신은 것처럼 긴장된다.


입구는 묘한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다. 어떤 화려함과도 바꾸기 싫은, 이를테면 비밀리에 진행되는 축제의 리허설 같은 것이다.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의 옷깃이 스친다. 스치는 순간은 잴 수 없는 간격을 만들고 빠르게 사라진다. 축제가 곧 시작되는 걸까. 적당히 밝은 조명 빛이 발끝에 올라탄다. 그리고 흘러가는 것들, 무도회의 왈츠, 가볍지만 장난스럽지 않은 음악, 그 뒤로 알 수 없는 대화들이 질서 정연하게 흘러간다. 사람들이 무엇엔가 골똘히 빠져있다. 깊지만 짧은 향유. 만약 그 모습을 하나의 음악으로 규정한다면, 속삭임으로 정의된 음표들이 도돌이표를 만나 처음으로 돌아가는 b단조 정도가 좋겠다. 다시 말해 톨게이트를 지날 때 잠시 들을 수 있는 덜컥, 정도의 짧은 무게감.



Janko Ferlic - @Specoaldaddy | Unsplash



안으로 들어간다. 천정까지 뻗은 책꽂이 앞에 서있다. 올려다본다. 난 지금 들판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걸까. 따뜻한 바람이 책장에서 불어온다. 나무 냄새가 봄바람과 함께 온다. '저 여기 잘 있어요. 당신도 잘 있나요' 내게 안부를 묻는 책이 있는가 하면, 침묵으로 일관한 나무가 있다. 너무 작은 인사는 금세 사라져 물음표만 남는다. 표지 모서리에 보풀이 일어난 책은 밤새 속상했는지 범인의 행방을 찾기 위해 책꽂이에서 한발 나와 책등을 드러내고 있다. 잘못하면 떨어질 텐데, 걱정 반 궁금증 반으로 발뒤꿈치 들고 꺼내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이다. 그 옆 2권은 1권보다 단정하다. 그 옆 3권은 2권보다 그 옆 4권은 3권보다 그 ··· 누구나 출발은 잘한다. 그다음부터가 서툴러서 문제지. 우린 모두 공평하게 두 번째부터 힘들어지고 그다음부터는 부족한 존재가 된다.



Eugenio Mazzone | Unsplash



발걸음을 조금 옮겨본다. 사람들의 어깨너머로 낯익은 정서가 건너온다. 한발 옆으로 비켜 살펴보면 그들은 고개를 반쯤 숙이고 서로 다른 항로를 여행 중인지 이색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키가 큰 남자는 왼발을 조금 앞으로 뻗은 채 오른발에 무게 중심을 싣고 줄곧 같은 페이지만 보고 있다. 문장에 뭇매라도 맞았는지 그의 얼굴엔 고독이 머물고 있다.


예감은 적중하라고 있는 걸까. 곧 그의 고개가 '아하, 그렇지'에 맞춰 끄덕여지고 왼발과 오른발이 자세를 바꾸며 무게 중심을 옮겨간다. 대개 이런 경우엔 방금 전까지 연인의 팔이 걸쳐있던 곳에 그 책 한 권이 얌전히 꽂히게 되는데, 그때 남자는 이미 종이에 물들어 한 권의 책이 되는 중이다. 흔들리는 생각들이 잠시 가라앉는다.



James Coleman | Unsplash


노인이 의자에 앉아 책을 본다. 구부정한 어깨, 어지러운 돋보기 사이로 활자는 커졌다 작아지고, 노인의 주름은 파도처럼 깊었다 얕아진다. 삶의 영역을 거의 답습한 노인이 책 속에서는 어린아이라도 된 양 글자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짚는다. 테이블에는 세 권의 책이 더 있는데 인생 전반을 통찰한 저자로서 법정 스님과 철학자 김형석이 있었다. 맨 아래 책은 제목이 보이지 않지만 화려한 표지 일부분으로 봐서는 아직도 늦지 않았다는 식의 가벼운 중얼거림이 담겨있으리라 상상해본다. 책을 보는 노인은 책을 덮을 때쯤이면 더 구부정해질 것이다. 아직도 늦지 않은 고목 한 그루가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이가 바닥에 앉아 그림책을 본다. 동물들이 사람처럼 옷을 입고, 말을 하며 걸어 다닌다. 이상한 일이 책 속에서는 당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우보다 덜 똑똑하다. 더러운 쥐가 책 속에서는 선구자가 되고 뱀이 리본을 매면 노래가 된다. 그러나 호랑이와 코끼리만큼은 책 속으로 들어가도 변하지 않고 어리석거나 친구가 많다.



Robert Anasch | Unsplash



갑자기 아이가 까르르 웃는다. 무릎을 쪼그리고 가까이 앉으니 나를 보며 그림책을 본다. 아이 손가락은 친절하게 그림 하나를 짚고 있다. 나무 아래에서 곰 한 마리가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것 같은데 티셔츠가 머리를 덮은 모습이었다. "존이 나무에서 떨어졌어요"라고 아이는 또 한 번 웃으며 말하지만, 세상에나 이걸 보고 웃는다면 난 아마 잘 시간도 반납하고 웃어야 할 텐데 다행인지 큰일인지, 순간 머리가 텅 비어 간다. 아이는 다음 페이지에서도 까르르 웃었고 다시 앞 페이지로 와서 더 웃었다. 나는 계속 텅 비어갔고 아이 곁에서 멀어질수록 웃음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생각의 빈 의자 ⓒ마혜경



날 흔들어 깨운 생각들이 썰물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한 편의 여백이 밀려온다. 그것들이 스치는 순간에 만들어진 간격, 아이의 웃음소리가 그 사이로 지나간다. 시가 된 사람과 소설 같은 사람, 아니면 이제 막 종이에 물들고 있는 사람들이 공평하게 투정 부릴 수 있는 곳, 그곳이라면 책의 경계가 모호해져 안과 바깥이 모두 책이 될 수 있다.



REVOLT | Unsplash



그곳엔 단아한 프롤로그가 기다리고 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울다가 웃을 자격이 있다
밑줄 긋고 싶은 얼굴이 있고
새로 덧대고 싶은 문장이 있다
연인이 있고
노인이 있으며
아이의 웃음 소리가 있다

지구 상에서 가장 안전하게 모험이 진행되는 곳,
나는 생각의 먼지를 털기 위해
자주 그곳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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