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의 색

담고 비우다

by 마혜경



담고, 비우다


걷는다
봄이 내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 뒤를 따라 걷는다
봄을 따라 걷는다
걷다 보면 여백이 생기니까
욕심 없이 산책하듯
어떤 길이 나오든
가볍게 걷는다
풍경은 아름답고,
어떤 길은 나지막하다
나와 주변 사이에
바람이 잘 통해서
바짝 마른 수건처럼
언제나 뽀송뽀송하다







운동을 하기 위해 오고 간 길은 하나인데, 돌아올 때마다 눈에 띄는 모습이 하나 있다. 매번 지나치다가 일주일이 지나서야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발걸음을 멈춘 순간 낯선 풍경을 감지했다. 이것을 무슨 색이라고 해야 할까.


쉬고 있는 굴삭기 ⓒ마혜경


바라본다.

오랜 시간 서서 곰곰이 생각한다.

하찮게 보이지만 이것은 고가의 중장비.

주황색과 검은색 투톤을 두르고 태어났을.

반들반들한 표면은 거친 작업으로 스크래치가 군데군데 있다.

새것이라는 느낌이 사라지자 시간이 준 또 하나의 컬러.

산화되고 녹슬어서 갖게 된 색.


이것을 무슨 색이라고 말해야 할까.

보람 있게 땀의 색...

덩그러니 혼자니까 고독의 색...?

너무 사전적이지 않나...



쓰임의 색.


숙련공이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자

혼자 남게 된 색.



'포클레인'이라고 말하면 면접관에게 즉시 잘리는,

실제 현장에서는 '굴삭기'로 불리는 몸.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한 부분이 동공을 밀고 들어온다. 이것은 무엇일까.


머리일까, 손일까...


Pixabay



분주하게 움직일 때는 영락없이 손이다, 손.

그러나 멈춰있는 지금은 머리...


검색해보니, 이것의 이름은 '버켓(bucket)'

사전적으로 '양동이, 들통'을 의미한다.

이름이 있었네. 이름이 필요할까 싶었는데...

심지어 이것의 크기에 따라 일의 규모와 종류가 결정된다니 중요한 몸신.



담는다.

땅을 파고 토사를 퍼 나르고

건물을 해체하고,

바닥을 고르게 정리하지.

네가 할 일은...



너에게 '담는다'는 말은,
계속의 의미가 아니라
'잠시'의 의미지
비워야 담을 수 있으니까
아주 잠시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201102002848_0_crop.jpeg ⓒ마혜경



여러 방향으로 돌아가며 탐독한다.

며칠째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땅에 머리를 박고 있었을 것이다.

겸허함이 흙으로 번져 내 발끝에 스며든다.

정작 자신의 피곤함이 묻힐 구덩이는 한 평도 못 판 채

단단한 머리가 단단하지 않은 땅에 기대어 스며들고 있다.

담아내는 속성을 잃었는지, 아니 잊었는지.. 비우고 있다.

자신의 쓰임이 땅에 스며들고 있다.


내 발끝으로 주워 담은 이 쓰임을, 나는 어떤 마음으로 담아야 할까.

그리고 어떤 쓰임으로 녹슬어야 하는지 고민해본다.

그래,

우선 나도 비우기부터.

담아야 비울 수 있고, 비워야 담을 수 있으니까.

공식처럼 담고, 비우고.


담고,

비우고...


그러다 보면 쓰임의 색으로 자연스럽게 녹이 슬겠지.



너와 난 지금,


텅 비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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