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하러 미용실에 갔다. 컷이나 펌도 아니고 염색이야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에 발길 닿는 곳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오늘은 잘하는 것보다 빨리 끝내는 게 최우선이다. 언제부터인지 시간이 더 소중해졌다.
미용실 안에는 원장과 손님 다섯. 한 여자는 이미 롯트를 말은 상태, 나머지 네 명은 그냥 소파에 앉아서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 바쁜데... 여긴 글렀나...'
어떻게 된 일인지 얼떨결에 소파에 앉게 되었다. 원장이 커피 한 잔을 뽑아 준다. 다시 나가기는 민망한 상황이다. 옆의 여자들은 원래 친한 사이일까. 방금 친해진걸까. 빼박이라 커피를 마시며 그냥 기다리는 걸로.
이야기가 귀에 솔솔 들어온다. 아이들 학원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누군가의 집안 이야기로 이어진다. 머리는 안중에도 없다. 내가 보기엔 수다를 떨기 위해 머리를 하러온 것 같다. 이제 보니 단체로 머리를 하러 온 모양이다.
'심심하던 차에 잘됐네.'
귀를 쫑긋 세웠다. 요즘 이어폰으로 음악을 크게 들어서 청력이 떨어졌나. 다 잘 들리는데 맨 끝에 앉아서 수세미를 뜨개질하는 여자의 말이 울리기만 한다. 다행히 나와 가까이 앉은 여자들 덕분에 듬성듬성 이야기가 연결되었다.
영재, 영재 하는데 이 자리에 없는 영재 엄마를 두고 하는이야기 같다.
- 영재 시누가 집을 나갔잖아. 그것도 애 둘만 두고
명품만 홀랑 챙겨서.
그래서 영재가 조카들챙기랴 살림하랴.
- 햐~ 명품을?
- 어머머머. 똑똑하네.
- 어쩐지, 영재 어쩌냐 팔자가 그렇게 꼬이냐.
대사가 한 바퀴 돌자, 샤넬이 어쩌구 구찌는 저쩌구 그래서 저래서, 말이 촥촥 달라 붙는다. 애들한텐 엄마가 있어야 한다, 고모는 엄마가 될 수 없다. 건너 건너 들어도 역시 의미 파악 확실하다.
그때 -----
바로 그때!
그게 아니고!!
단호하고 명백하게, 그게 아니고!!
여태 조용하던 여자가 중화제를 바른 채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거울 속 그녀는 단단해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무엇일까. 명품백이 아니란 말일까. 아님 영재가 조카를 챙기는 건 맞지만 살림하는 건 아니라는 걸까. 그녀는 분명 '그게 아니고'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야기는 아침 드라마처럼 잔인하게 딱 거기서 멈췄다. 멈춘 게 아니라 내게만 벌떼처럼 울렸다. 그 소리는 내 귓가를 간지럽게만 하고 정작 긁어 줄 '그게 아니고'의 출처는 멀리 아주 멀리 휘발되었다. 거울에 비친 입 모양을 보느라 노력했지만, 조그만 입은 중화제에 굳어버렸는지 새모이를 쪼는것처럼 보였다.나를 제외한 원장과 모든 여자들이 서로를 때리며 시끄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뭘까.
그동안 짜 맞추며 들었던 앞의 이야기는 다 필요 없단 얘긴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죄다 아무것도 아닌? 다행히 그게 아닌 이유를 알아낼 방법이 있다. 가까이 앉은 여자들의 말을 조합해서 다시 추측하면 된다. 드라마를 건너뛰어 봐도 곧 연결되지 않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말이다.
- 뭐 어?
- 설마 아~~~
- 아 뭐라고?
-누가 그래, 누가?
이걸 가지고 뭘 추측할까. 소설 한 편을 쓰고 말지...
원장이 롯트를 풀고 머리를 감기고 드라이를 한다.
입이 조그만 여자는컬도 잘 나오는가보다. 곱슬곱슬 웨이브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좀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가운을 벗고 두툼한 코트로 갈아입는다.
- 머리 쥑인다.
- 이뻐 이뻐.
- 그래? 콩나물국밥 살게, 가자.
다섯 명의 여자들은 짝퉁 비슷한 가방을 들고 우르르 나갔다. 뭐지? 설마 그녀가 네 명의 여자를 끌고 온거? 묻어온 여자들은 그녀가 머리 하는데 지루하지 않도록 아침부터 이야기꾼을 자처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녀가 갑이다. '그게 아니고'라는 말로 그동안의 이야기를 일순간에 정리하는 기술, 그리고 네 명의 여자를 아침부터 개인사에 끌어들이는 기술, 엄청난 일이다. 손님 많다고 그냥 지나쳤다면 손해였을 이 순간.
여자들은 볼일도 같은 시간대로 맞출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누구든 청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화장실에 동행할 수 있다. 화장실도 그럴진대 미용실이라고 예외일까. 긴 시간이 걸리는 퍼머는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여자들은 품앗이처럼 몰려다닌다. 기술과 약품이 발달해도 시간을 단축시키기는 어렵다. 그만큼 약이 독해질 테고, 결국은 두피와 모발에 안 좋을 테고.
오늘 알게 된 얘기지만
같이 몰려다니지 못할 테고,
그래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주고받기 힘들 테고.
염색을 하려고 가운을 입고 의자에 앉아 조심스럽게 원장에게 물었다.
- 근데 아까 뭐가 아니라는 거예요?
- 아, 그 이야기? 애 둘 데리고 나갔대요.
그래서 영재가 명품백을 싹 중고시장에 내놨다고.
- 네엥?~~ 참 반전이네요. 정말~
얼마나 기다리나요?
미용실에 기다리는 고객이 많다고 소심하게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사람 많다고 섣불리 단정 짓지 마시길.
그게 아니고,
여자들은 잘 몰려다녀요. 특히 미용실을. 그러니 반드시 물어보세요.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