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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Aug 02. 2024

강렬한 감을 가진 나약한 인간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작은 자취방의 문을 열쇠로 잠그며 다음 달엔 꼭 번호로 여닫는 도어락을 사다 달아야지, 라고 마음 먹었다.

아무리 작고, 아무리 하찮은 것들만 살고 있는 곳이라도, 그래서 도둑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 곳이라도, 주인인 나만은 그렇게 취급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지킬 필요 없는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내 자신도 하찮아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 뭐 훔쳐 갈 거 있어? 이 동네 뭐 훔쳐 갈 거 있나? 그래서 이 동네엔 도둑도 없어. 문 안잠그고 다녀도 돼. 아주 청정지역이야!"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이런 무례한 이야기를 지껄이며 컬컬 웃던 집주인 아저씨 얼굴이 떠올랐다. 이 집을 계약하기로 결정했던 날, 오랜만에 마주친 열쇠 잠금장치를 보고 내가 다른 마스터키 같은 건 없냐고 물어보자 그는 그냥 '없다. 그 열쇠가 다다.'라고 담백하게 대답을 하는 대신 저런 쓸데없는 농담을 늘어놓았다.

사실 마스터키가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되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그렇게 어물쩡 넘어가더니 계약서에 도장만 꽝 찍고는 크고 무거워보이는 세단을 타고 떠났기 때문이다. 멸치처럼 마르고 건조하게 생긴 부동산 아저씨가 뭔가 불만이 있어보이는 내 얼굴을 슬쩍 보더니 말했다.


"저 양반한테 뭘 기대 하지마. 그냥 월세가 싼 대신에 불편한 점이 있구나, 하면 돼요. 물 새고 불 나는 거 아니면 알아서 처리하라고 할 거야. 저 양반은 여기 말고도 집이 아주 많아서 세입자들한테 크게 신경 안써. 그게 아가씨한텐 더 좋은 걸 수도 있지 뭐. 괜히 윗집 아랫집 살면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집주인들 보다 편해. 도어락은 그냥 나중에 불편하면 아가씨가 바꿔 달어."


그래, 부동산 아저씨 말대로 그 집의 월세는 그동안 내가 보고 다닌 곳들과 비교해서 월등하게 낮은 편에 속했다. 집은 작고, 낡고, 어둡고, 어딘지 모르게 얼룩덜룩한 느낌이 들었지만 싼 월세 덕에 집이 빌 틈 없이 세입자들이 금방 채워진다고 했다. 그리고 그 집이 나오자마자 집을 보러 온 내가 참 운이 좋다고, 그러니 다른 사람이 채 가기 전에 얼른 가계약부터 걸라고 꼬드겼다.






첫 독립, 첫 자취집을 구하는 것이라 무엇부터 보고, 비교하고, 협상해야 하는지 인터넷에서 글로만 배운 나였기에 혹시 '도배, 장판'은 해주시냐고 말을 꺼내봤지만 뭐 이런 집에 도배 장판까지 새로해주냐는 핀잔만 들었다. 이렇게 싸게 내주는데 그런 것까지 해주면 본인이 남는 게 없다며 집주인 아저씨는 불룩한 배가 들썩 할 정도로 버럭 소리를 쳤다. 나는 몇집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쳐버려서 그 버럭 소리를 듣고는 그냥 계약을 해버렸고.

돌아보는 집마다 똑같은 질문을 할텐데 그 때마다 집주인들의 버럭하는 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늘 말했던 나의 '나약한 정신상태'가 바로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내가 '끝까지 해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한다'고 했다. 그는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지만 그렇게나 가까이서도 나를 가장 잘 모르던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겁쟁이가 아니다. 나의 정신은 나약하지도 않다. 그저 나는 세상의 이야기들이 대체로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을 잘 하는 편에 속했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난 이후에야 그 이야기를 비로소 파악한다. 어떤 사람은 중반까지 읽고 나면 그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파악하고, 어떤 사람은 다 듣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고, 누군가 '이건 이렇고 저런 저렇다'고 붙잡고 설명을 해줘야 '아...'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 중에서도 아주 예민하게 이야기의 앞뒤를 금방 알아차리는 사람이었다. 기승전결의 이야기가 있다면 '기'를 다 듣기도 전에 '결'을 느낄 수 있는 타입.

이건 지능에 대한 것이 아니다. 물론 아예 관련이 없다고 할 순 없겠지만 지능보다는 '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나는 단순히 이야기 안에 들어있는 서사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서두를 여는 화자의 얼굴, 표정, 목소리, 눈빛, 손짓, 옷차림, 걸음걸이, 제스처, 들고다니는 소지품, 얼굴에 진 주름 형태, 머릿결, 향기 등 너무나 많은 사전 정보들을 함께 볼 수 있다.

물론 이걸 특별한 재능이나 재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신경 써서 보려고 하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다만 나에게는 그것을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받아들이는 정보처리 장치가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다.

위기의 순간에 이 장치는 분명히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크든 작든 나에게 사기를 치려는 사기꾼들을 초반에 걸러낼 수 있었고, 나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친구들을 멀리할 수 있었고, 오랫동안 사귀면 좋은 친구들을 알아볼 수 있었고, 도망쳐야 할 순간이 눈 앞에 닥치지 전에 도망칠 여유를 벌어주었다.






그는 이 여유의 순간을 '겁쟁이'라고 표현했다. 해 보지도 않고 도망친다고. 하지만 난 해보지도 않고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결론을 알기 때문에 굳이 예정된 실패를 재 확인 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었고, 그에게는 없었을 뿐이다. 다만 나에게는 그것이 없는 사람에게 이게 어떤 능력인지, 어떤 감인지, 어떤 매커니즘으로 작동하는 것인지 설명하고 이해시킬 재주가 없었다.

하지만 이 능력은 마치 신기처럼 강렬하거나 과학적 통계 데이터처럼 100% 들어맞는 것이 아니다. 나는 대체로 이야기와 인간관계의 흐름에 대해 보통의 사람보다 뛰어난 감이 있지만 당연히 틀릴 때도 있다. 나 역시 믿고 싶지 않은 결론에 대해서는 분명 초반에 그런 감을 느끼더라도 인정하지 않고 밀고 나갈 때도 있었고 극복할 수 있었던 적도 많았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좋은 사람을 만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 수록, 내 안에 이 '감'에 대한 데이터가 쌓일 수록 정확도는 높아져갔고 정교해져갔다. 어릴 때는 열번 중 다섯번의 경우에 맞았던 것이 이제는 열번 중 여덟번이 맞게 되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더 나이가 들면 나의 데이터는 더욱 풍부해질 것이고 그때는 열번 중 여덟번이 아니라 아홉번, 아홉번의 반까지 적중률이 높아질 수도 있을 거라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여덟번의 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걸 나약하다고 하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이다.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고, 자신은 그런 것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나에게는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과 판단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세상이 전부라고 판단하는 오만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서로에게 나약하고, 오만하다는 평가를 내리며. 한 때는 사랑했지만,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가혹한 평가를 내리지만 바로 그 때문에 더이상은 함께 할 수가 없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이런 이별이 그리 흔치 않은 일은 아닐 것이다. 인생 대부분의 시간은 생각보다 모순적이고 보편적이지 않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기억하거나 공식으로 정의내릴 수 없었을 뿐, 대체로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고 받은 날, 나는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내 가장 큰 꿈을 포기했다.


"안될 것 같아."


"왜?"


내가 말을 꺼내자, 그의 표정은 그 어느때보다도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냥. 왠지 안 될 것 같아. 더 하면 안될 것 같아."


"해봤어? 정말 끝까지 해본 거 맞아? 너 몇번이나 해봤는데?"


"그런 게 아냐. 그냥 깨달은 거지. 나는 재능이 없어. 더 이상은 시간 낭비야."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공모전 몇 번 떨어진거? 세상에 한번에 공모전에 일등으로 데뷔하는 천재 작가가 얼마나 되니? 그런 사람들도 있지. 하지만 대부분은 몇번이고, 몇년이고 무명의 작가로 등단도 못하고 습작만 해. 천재가 아닌 이상. 너는 네가 천재라고 생각했니?"


나는 날카로운 말에 내 몸이 얇게 수도 없이 베이는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잔인할까? 나를 위한 말인데, 나를 위한 분노이고, 나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의 표현인데 그의 말과 표정은 아주 작지만 날이 바짝 선 주머니칼 같았다.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아. 천재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사실 지금도, 매일 매일 밤마다 내가 천재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아닌 거 잘 알아. 그런데 그게 아니라도 안될 것 같아."


나는 또박 또박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왠지 내 성대 근육은 누군가 툭 건드린 조개처럼 꽉 다물어져서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작고, 쪼잔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내는 변명의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아닌 걸 아는데도 계속하는 게 더 괴로워. 안될 걸 아는데도 노력이 부족해서일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속이는 게 나는 너무 괴로워."


그는 와다다 퍼붓던 것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니, 쏘아보았다. 나는 감이 뛰어난 편이니 그의 눈빛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모른척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소리 없는 그의 말이 귓가에 따다다다 꽂히는 것만 같았다.


"이제 내 앞가림 할 때인 것 같아. 안되는 꿈 쫒는 거 말고. 그런 나이도 됐고."


"너는...."


이번에는 그의 성대가 쪼여들었다. 소리가 내게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들렸다.


"너는, 너무 나약해. 끝까지 해보지도 않고 포기해. 늘 그래.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는데 너는 마치 다 안다는 것처럼 미리 겁을 먹고 도망쳐버려."


"도망치는 거 아니야."


"도망치는 거야. 지금도 도망치는 거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너무 오만한 생각 아니야? 내가 어떤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도 모르고 그까짓걸로 겁먹고 도망치는 거라고 판단하는 건 오만 아니니?"


"말 돌리지마. 그런 식으로 도망치는 것도 이제 난 지겨워."


"......"


사실 나는 이 날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꿈을 포기한다고 했을 때 그의 반응, 그의 화와 짜증, 그리고 우리의 언쟁을 이미 예상했었다.


"그냥 이제 그만 하자. 나는 더 보고싶지 않아. 네가 이렇게 도망치는 모습. 네 옆에서 그걸 앞으로 몇번이고 보게 되는 걸 더 하고 싶지가 않다."


언쟁 끝에 나올 이별의 한 마디도 어쩌면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믿고 싶지 않았을 뿐.


"그냥 이제 우리 그만해."






띠,띠,띠,띠 삐리릭-


뾰족한 전자음을 내며 가게의 도어락이 열렸다. 나의 작은 타로가게는 작은 카페 안에 있다. 친한 선배의 친한 친구가 하는 작은 동네 카페의 한 구석에 아주 약간의 이용료를 내고 세들어 있다.

내 자리는 앤틱가구 거리에서 발품을 팔아 구입한 50년 정도 된 가로 120cm 정도의 빈티지 책상이다. 이 카페의 주인 언니가 이 자리를 빌려주며 그랬다. 다른 건 다 여기 있는 걸 그냥 써도 되지만 책상만은 네 걸 가지고 왔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 책상은 왠지 사연이 많아 보이는 상처 가득한 고재로 만든 것이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왜냐고 물었더니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게 뭔가 더 그럴듯 하잖아? 이왕이면 돈 많이 벌게."


그럴싸한 이유라고 생각해서 나는 흠집도, 긁힘도 많은 이 책상을 100만원 남짓 주고 샀다. 내 통장의 잔고를 탈탈 털어도 이 책상의 값의 반도 되지 않아 주인언니 대신 아침에 일찍 출근하여 카페 문을 열어주는 것을 조건으로 그녀에게 무기한 대출을 받긴 했지만.

어디까지가 그녀의 계획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온통 내것이 아닌 공간에 나의 물건을 하나 채워놓는 것으로 나름 이 곳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 언니는 몇년이나 자신을 괴롭히던 이른 오픈에서 벗어나 아침잠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에게 윈윈이라 생각하며 매일 정해진 곳으로 출근을 하게 된 게 벌써 반년이 넘었다. 그러니까, 그와 헤어진 것도 반년이 넘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각종 머신들을 켜고, 셀프바에 물과, 시럽과, 빨대와, 종이 냅킨을 채우고, 비로소 입구에 걸린 오픈 사인을 돌려 놓으면 준비는 끝이다. 생각보다 간단한 하루 시작 준비이다. 이제는 사연 많아 보이는 내 자리로 돌아가 가만히 앉아 새롭지만 새롭지 않은 사연을 들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면 된다.







The Hanged Man (거꾸로 매달린 소년) : 생각이 많고 창의력과 집중력이 많음. 무언가에 꽂히면 높은 능력을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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