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Sweet pea(스위트피)
브런치에 연재된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이제 서점에서 만나요!
May: Sweet pea
향기가 달콤한 꽃들 중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꽃은?
이런 질문을 던지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다양한 답이 나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생김새 때문에 꽃을 즐기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기분 좋은 향기를 즐기기 위해 꽃을 사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력이 좋지 않은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서라도 꽃은 매력적인 향기를 가져야 했다.
스위트피 (Sweet pea)
꽃의 향기는 대부분이 황홀하고 달콤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스위트피(Sweet Pea)이다. 달콤한 콩이라는 매우 심플한 뜻의 이름을 가진 스위트피는 사실 달콤한 맛으로 먹는 콩이 아니라 달콤한 향을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꽃이다.
씨앗은 조금 작은 완두콩 모양으로 생겼으며 콩과의 식물인만큼 줄기에 귀여운 덩굴손도 있고, 키도 금방금방 자라난다. 작고 앙증맞은 꽃은 꼭 얇은 플레어 스커트처럼 생겼는데 물결이 치는듯 섬세하고 작은 꽃망울들이 줄기끝에 조르륵 여러개 달려있다. 색도 정말 다양한데, 진한 색이든 연한 색이든 상관없이 꽃잎이 반투명에 가깝고 굽슬굽슬한 주름이 잡혀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때도 살랑 살랑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춤추는 것 같은 모양 때문인지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스위트피의 달콤한 향기가 살랑살랑 주변으로 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스위트피는 철저히 관상용으로 개량된 꽃이다. 이름에 콩이라는 단어가 분명 붙어 있지만 식용으로는 금지되어 있다. 사람도, 동물도 먹으면 탈이난다. 콩이지만 먹을 수 없는 콩.
나는 가끔 콩과로 분류되지만 꽃만을 위해 여러차례 변신의 변신을 거듭해 키워진 스위트피를 볼 때면 한번씩 이질적인 느낌을 받곤 한다. 콩(pea)에서 시작되었지만 더이상 콩(pea)이 아닌, 콩.
나는 언제나 순간 순간에는 원하는 방향이 있었다. 초, 중, 고등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과목을 배우고 싶다는, 남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로 심리학과에 진학했고, 공부 자체보다 심리학도로서의 대학생활을 즐겼다. 과 동기들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내가 인간의 마음을 쉽게 읽을 수 있다고 착각해 주었기 때문이다. 심리학개론 시간에 주워들은 단어 몇마디면 충분히 설득되었다.
하지만 취업 준비를 시작했을 때,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는 한 ‘심리학과'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일반 회사'가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누구보다 소비자의 마음을 더 잘 알 수 있다'고 주장하며 광고와 홍보쪽으로 일을 구했다.
그 후로 몇년간 식품회사의 광고 관련 일을 하며 음료와 디저트를 광고하고 마케팅 하는 일에 열중했다. 평생 그 일에 정착할 줄 알았기에 업무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모조리 배웠다. 연구원도 아니면서 제과제빵 학원을 다니고, 바리스타 학원도 다녔다. 패키지 디자이너도 아니면서 회의 때 한 마디라도 알아듣기 위해 웹디자인 학원을 등록했고 관심을 가지다 보니 편집 디자인 공부도 했다. 이미지가 필요해 좋은 카메라를 샀고, 사진을 배웠다. 마케팅에 스토리가 도입되는 시기였기에 스토리텔링 수업을 받았고, 맡고 있는 브랜드의 SNS도 운영했다. 그리고 업무 스트레스를 줄이고 힐링할만한 것을 찾다가 꽃을 배우기 시작했다. 행복했다.
어느 새 나는 많은 것들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모아서 모두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니 ‘카페'가 적당해 보였다. 내가 구운 빵과 내린 커피를 팔며 그 공간을 꾸미기 위해 꽃으로 장식하고 모인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와중에 꽃에 대한 관심은 향기에 대한 관심으로도 옮겨갔다. 나는 바로 조향사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만든 것을 예쁘게 포장해 팔기위해 패키징 수업을 찾아다녔다. 나는 모든 것의 전문가인 것 같기도 했고, 순간의 흥미를 쫓는 유목민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시작한 모든 것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나를 두드렸고 다음에 해야할 일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를 시작해야 하는 지점들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엔 그냥 받아들였던 것 같다.
고민의 지점에는 ‘일관성'과 ‘지속성'에 대한 묘한 죄책감같은 것이 있었다. 내가 너무 인내심이 없는 건 아닌가? 어떻게든,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파 보아야 하는 건 아닌가? 왜 나는 또 다른 것이 궁금한 것인가?
뭐든 시작한 것은 끝까지 해보고 포기하는 것이 삶에 대한 진실한 자세라던데
내 인생의 키는 작은 관심과 흥미에 너무 자주 방향을 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꽃시장과 꽃집에서 만나는 꽃들 중 과거 들판에서 피어나던 시절 최초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꽃은 거의 없다. 사랑을 받지 못해 정원에서 사라진, 그래서 점차 잊혀진 꽃들은 많지만 인기가 있는 꽃들은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 매일 새로운 종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본래는 없었던 색이 추가되는 것은 기본이고, 한겹이었던 꽃잎이 겹겹으로 더 풍성해진다거나, 꽃송이의 크기가 커지거나 작아지고, 향기가 좋은 꽃은 더 진한 향기를 갖게 된다.
단순히 겉모습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병충해에 잘 견디는 것, 더 많은 꽃을 피워 튼튼한 종자를 맺는 것, 외래종이라면 본래의 원산지와는 다른 척박한 기후에서도 견뎌낼 수 있는 것과 같이 환경의 변화에 맞춰 생존의 확률을 높이는 것도 추가된다.
그 결과, 어떤 꽃들은 지금 모습에서 예전의 원래 모습은 상상하지 못할 만큼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완두콩의 한 종류에서 시작됐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스위트피의 콩은 먹지 않는다. 하지만 스위트피는 꽃시장에서 꽤 몸값이 나가는 고가의 꽃 중 하나로 인기를 끌고 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콩줄기를 사면서 콩이 얼마나 열렸는지, 얼마나 맛있는지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꽃잎의 아름다운 주름 무늬와 달콤한 향기와 우아한 줄기의 곡선을 찬양한다.
스위트피가 콩으로 시작하여 콩이 아닌 것으로 끝난 콩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스위트피는 그깟 완두콩은 넘볼 수도 없을 만큼의 가격에 거래되며 수많은 플로리스트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그깟 일관성과 지속성을 따르지 않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수겠냐 싶다. 인생은 모르는 거니까. 어디에서 터질지.
방향을 트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순간 순간 나에게 가장 옳은 선택을 했다면.
온갖 것에 관심을 기울이던 날라리 마케터에서 변방의 플로리스트로 변신한 나는 지금 그동안 나에게 쌓였던 모든 경험과 배움을 모두 꽃에게 올인하고 있는 중이다. 나를 거쳐간 수많은 것들 중 가장 행복한 기분에 머무르게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손의 감각, 색채에 대한 이해, 영감을 주는 향기, 디자인의 비주얼라이징, 마케팅적 기술까지.
다른 플로리스트들의 작업과 비교하여 그게 조금이라도 나의 차별성에 도움이 되었다면 그간의 방황은 의미있는 것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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