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Tulip (튤립)
브런치에 연재된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이제 서점에서 만나요!
March: Tulip
사람들에게 가장 친근한 꽃을 꼽자면 장미를 들 수 있다. 꽃을 잘 모른다는 사람도 장미는 안다. 하지만 장미를 그려보라고 하면 선뜻 그려보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튤립(Tulip)을 그려보라고 하면 곧 잘 그 특징을 잡아 그린다. 특징적인 생김새를 가지고 있기도 하려니와 모두들 머리속에 담고 있는 익숙한 튤립의 생김새가 있기 때문이다.
한때 유럽에서 구근 하나의 가격이 집 한채 가격과 맞먹었다는 튤립은 오랜 역사만큼 사람들에게 꾸준히 사랑을 받아왔다. 보통 이렇게 유명한 꽃들은 여러가지 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튤립의 전설은 주로 튤립의 익숙한 생김새와 관련이 있다.
튤립 (Tulip)
어느날 예쁘고 순진한 처녀 튤립에게 세 남자가 찾아와 청혼을 한다. 첫번째 남자는 왕자였는데, 그는 자신과 결혼을 해주면 자신이 쓰고 있는 왕관을 튤립에게 바치겠다고 했다. 두번째 남자는 기사였는데 자신과 결혼을 해주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귀한 칼을 바치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남자는 돈 많은 상인의 아들이었는데 자신과 결혼을 해주면 금고 가득한 황금을 바치겠다고 했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이유지만 상상할 수 없이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던 튤립 처녀는 누군가 한명을 선택하면 남은 두명이 상처받게 될 것이 안타까워 아무도 선택하지 못하고 자신은 원하는 것이 없다며 세명의 청혼을 모두 거절한다. 그리고 한심한 세 남자는 정말 그녀를 사랑해서 청혼을 했던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게도 튤립에게 ‘평생 아무하고도 결혼을 못할 것'이라는 저주를 퍼붓고 떠난다. 저주 때문이 아니라 그 황당함에 홧병이 났을 것이 분명한 튤립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는데, 이를 안타까이 여긴 꽃의 신 플로라가 튤립에게 왕관을 닮은 꽃, 칼을 닮은 잎, 황금덩어리를 닮은 뿌리(구근)를 주고 봄마다 피어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에게 튤립을 그려보라고 하면 포크처럼 뾰족한 끝을 가진 길쭉한 꽃을 그린다. 사람들이 아는 튤립은 왕관같은 모양이다. 하지만 나에게 튤립을 그려보라고 한다면 나는 아마 깊은 고민에 빠질 것이다. 나는 정확한 튤립의 모양을 모른다. 아니, 어느 것을 튤립의 진짜 얼굴이라고 해야할지를 모르겠다.
튤립은 봄에 피는 대표적인 구근 식물로 늦 가을과 겨울에 심어 따뜻한 봄에 꽃을 피운다. 그래서 튤립의 꽃잎은 시간이 아닌 온도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추운곳이라면 볼 수 있는 건 쌜쭉한 봉오리 상태의 모습이다. 하지만 튤립을 꽂아놓은 방안이 따스하다면 금새 헤벌쭉 벌어져 웃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튤립은 플로리스트에 의해 다시 한번 새로운 표정을 갖게 된다. 조금 벌어져 있지만 안쪽으로 슬쩍 말려있는 꽃잎을 조심스럽게 바깥쪽으로 뒤집으면 튤립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다소 예민해 보였던 뾰족한 얼굴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것 같이 둥글넓적한 모습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꽃잎이 뒤집어져 밖으로 드러난 꽃의 가운데 부분(꽃술이 있는 부분)은 한가지 색인 줄 알았던 꽃잎 색과는 너무나 다른 컬러를 띄고 있어, 튤립의 색을 한 가지로 정의내릴 수 없게 한다. 오렌지색 튤립인 줄 알았는데 가운데 부분은 갈색이라던가, 흰튤립인줄 알았는데 가운데 부분이 빨간색이라던가 하는 다채로운 반전이 있다.
나는 이 열린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튤립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꽃이라고 믿었다. 크고 색이 선명한 몇개의 꽃잎이 위를 향해 뾰족 솟아 있는, 조금 맹숭맹숭한 봄꽃이라고만 알고 있다가 처음 튤립을 뒤집어 보았던 날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섬세하고도 복잡한 내면은 단번에 나를 매료시켰다.
그러나 다시 서늘한 곳으로 데려가면 튤립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입을 앙 다문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이 차가운 바람이 아닌 따스한 햇살이었던 것처럼 다정하고 화사한 튤립의 얼굴은 따뜻함에만 반응한다. 로맨틱한 꽃이다.
튤립을 사오는 날이면 나는 따뜻한 곳에 잠시 두어서 꽃잎이 슬쩍 벌어지게 하고, 양손을 쓱쓱 몇차례 비벼 손에 온기를 입힌 뒤, 정말 섬세한 손길로 그야말로 ‘살살' 꽃잎을 뒤집는다. 충분히 벌어지지 않은 경우에는 무리해서 뒤집지 않고 잠시 더 온기가 스미도록 기다려준다. 억지로 뒤집다가는 꽃잎이 떨어져 버리거나 찢어질 수 있다.
수업을 하다가 ‘아이 망쳤어요. 선생님은 대체 어떻게 한 거에요?'라고 묻는 학생들을 자주 본다. 나라고 별다른 비법이 있을리가 없다. 다만 튤립에게 충분한 온기와 스스로 벌어질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고 억지로 열려고 했다는 것만이 다를 뿐.
그리고 지금까지는 이렇게 속을 훤히 들여다 보이게 뒤집은 튤립을 보고 ‘이건 튤립!’이라고 첫눈에 알아보는 사람을 거의 만나 보지 못했다. 보통은 ‘이 예쁜 꽃은 무슨 꽃이죠? 처음 보는데.’라는 반응이다. 그래서 아직 그 중 어떤 것을 튤립의 진짜 얼굴이라고 해야하는지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튤립이 세명의 청혼자들이 내민 거창한 선물을 거절하고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다고 했던 건 어찌보면 너무 당연하다. 나라도 그런 청혼은 거절 했을 것 같다. 세 명이나 되는 대단한 남자들 중에 왜 진실한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 남자는 하나도 없을까?
튤립이 아무에게도 선뜻 보여주지 않는 맨 얼굴을 보이는 건 온기와 애정 어린 손길이 스칠 때 뿐이다. 앙 닫힌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싶을 때 가장 필요한 건 봄볕같은 따스함과 기다림 뿐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없는 물질과 위력은 나그네 뿐 아니라 꽃 한 송이를 열 힘도 없다.
나는 튤립 전설의 결말이 어쩌면 생각보다 해피엔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왕관과 명검과 황금 중 어느 것도 받지는 못했지만 ‘꽃’이 되었다. 한 남자의 꽃이 되는 대신 진짜 꽃이 되어 매년 봄, 활짝 피어날 수 있게 됐다. 튤립의 전설은 슬픈 전설의 하나로 회자되고 있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청혼을 거절했다는 이유만으로 저주를 퍼부은 남자 중 하나를 선택할뻔 한 운명보다는 꽤 괜찮은 엔딩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전설에는 상징만 있을 뿐 명료한 설명과 해석이 없다. 어떤 것이 진짜인지 모르는 튤립의 진짜 얼굴처럼.
[일년, 열두달 흔들리는 꽃 출판 펀딩]
* 2020년 2월 10일까지
* 플라워엽서/에세이 등 다양한 펀딩 선물 선택 가능
https://www.tumblbug.com/yearfl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