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Helloborus (헬레보루스)
브런치에 연재된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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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Helloborus
세상의 많은 꽃들은 대체로 추위가 가시는 봄에 싹을 틔우고 다시 추위가 찾아오면 땅 속으로 사라진다. 그래서 모두들 웅크린 채 찬 바람과 혹독한 추위를 피해 숨어있어야 하는 겨울보다 생명의 기운이 찾아오는 봄을 기다린다.
하지만 모든 꽃에게 이런 공식이 통하는 것은 아니다. 더위가 힘을 잃고 찬 바람이 불어올 때 제 계절을 맞이하는 꽃들도 있다. 그런 꽃들은 한 겨울 추위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다가 봄이 완전히 자리를 잡을 때쯤 꿈처럼 스르르 사라진다.
헬레보루스(Helleborus).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 중 하나인 헬레보루스의 닉네임은 크리스마스로즈이다. 자연의 꽃이 거의 사라지는 크리스마스 즈음 절정으로 피는 꽃이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크리스마스를 지나 겨울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헬레보루스 역시 가장 아름다운 절정의 시절을 맞이한다.
헬레보루스의 얼굴은 꼿꼿하다기 보다 수줍은 듯 곡선을 그리며 아래를 향하고 있고, 습자지처럼 꽃잎은 얇고 연약한 봄꽃들과는 다르게 도톰한 두께감이 느껴지며, 속이 들여다보이는 솔직한 얼굴을 하고 있다. 컬러는 밝은 연둣빛을 바탕으로 깔고 옅은 핑크, 로즈핑크, 빈티지한 퍼플 등 다양한 종류로 나뉘어 진다. 어떤 색이든 예쁘지 않은 아이가 없다. 플로리스트에게는 봄, 여름, 가을의 연약하고 화려한 꽃들이 주춤해진 겨울 시즌 가장 고마운 꽃이다.
섬세한 생김에 단단한 꽃의 얼굴도 좋지만 내가 헬레보루스를 좋아하는 이유 중 또 하나는 유연한 가지에 있다. 통통한 헬레보루스의 갈색 가지는 나무처럼 단단해 보이지만 어떻게 휘어도 쉽게 부러지지 않을만큼 유연하다. 꽃다발을 만들다보면 가지가 약한 꽃들은 한 두송이 쯤 꺽이기 마련인데 헬레보루스는 다소 거칠게 다루어도 꺽이거나 상처가 나지 않는다. 거친 계절을 제철로 둔 꽃답게 물에 넣지 않고 몇시간 있어도 쉽게 시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계절과 시간의 기준에서 가만히 들여다 보면 헬레보루스는 순방향이 아니라 역방향의 생주기를 가진 것 같다. 하지만 헬레보루스가 잘못된 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만의 주기를 가지고 있을 뿐.
아주 어릴 때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고,
'주변의 속도에 따라 나의 속도를 정하지 말자', '나에게 맞는 방향을 찾는 것이 먼저다', '방향을 찾은 후에도 방향을 잃을 정도로 달려나가지 말자'라고 늘 다짐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인생을 살고 즐기리라, 고.
하지만 이 방향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는데 속도까지 느린 것처럼 느껴지고 시간이 지날 수록 '이것이 맞다'는 확신이 짙어지는 게 아니라 예전만큼 어리지도 않다는 사실만 확실해진다. 태연해지기 쉽지 않다.
1월이 되어 새로운 계획을 세울 기회가 다시 돌아왔지만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을 용기는 옅어진다. 망설이며 신중한 와중, 가까운 이들에게 '게으름뱅이'라는 질타를 받기도 한다.
나는 그저 나에게 필요한 만큼 생각하고, 걷고, 쉬고싶을 뿐인데. 내 사이클이 다른 것을 왜 비난하지? 나는 나만의 속도와 방향이 있다고 하면서도 왜 그것에 마음을 쓰지?
평온치 못한 나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매년 1월 1일에는 지난 연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유선과 무선, 두권의 다이어리 중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무지 다이어리를 꺼내어 적고 싶은 것을 적는다. 내가 적는 것에는 제한이 없다.
평소 가지고 싶었던 것, 사려고 마음 먹었지만 비싸서 망설였던 것, 여행 가고 싶었던 곳, 가고 싶은 계절, 당장 사 먹고싶은 음식,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었던 요리, 새로 배워보고 싶은 것, 키우고 싶은 꽃, 공부해야할 식물, 준비해야할 시험, 지난해에 이어 더욱 박차를 가해서 준비해야 할 일, 읽고 싶은 책, 쓰고 싶은 글.......
나는 다이어리에 새해의 욕망들을 적을 때 거기 적힌 것들이 단어가 아니라 씨앗이라고 생각한다. 의미 없어 보이는 단어와 단어들을 적어나가다 보면 연결되는 것들, 혹은 새로이 파생되는 것들이 생기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연관 없어 보이는 씨앗들에 싹이 터 다른 것들과 덩굴처럼 얽힌다. 그리고 나서야 내가 가려고 했던 방향과 의미가 조금씩 드러난다. 단어로서만 존재했던 순간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이다. 씨앗을 뿌리는 그 순간에는 이 씨앗이 얼마나 큰 꽃을 품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보통 작은 씨앗은 작은 꽃을, 큰 씨앗은 큰 꽃을 피우지만 씨앗의 크기가 항상 꽃의 크기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양귀비의 씨앗은 이게 먼지인지 씨앗인지 분간이 잘 안될 정도로 작지만,
나중에 그 안에서 피어나는 꽃은 씨앗이 완두콩 만큼이나 큰 스위트피의 꽃보다 훨씬 크다.
작은 씨앗 안에 보이지 않는 꽃의 지도가 압축되어 새겨져 있듯, 나 역시 나도 모르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나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헬레보루스를 보라. 정반대의 방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겨울을 대표하는 꽃이 된 것을. 불안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굳어져 있다면 헬레보루스의 줄기처럼 유연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의 속도와 방향으로 나를 재단하지 말자. 타인의 불안한 시선을 내것처럼 느낄 필요가 없다. 다른 꽃들이 봄볕에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할 때 자기만의 속도와 시간을 가지고 기다렸기 때문에 헬레보루스는 겨울 꽃시장에서 가장 사랑 받는 꽃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헬레보루스의 꽃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나의 불안을 진정시켜 주세요'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 이유'라고 한다. 완벽해 보이는 헬레보루스도 자신이 향하는 방향과 속도가 불안했던 걸까? 존재 이유와 불안을 동시에 꽃말로 가지고 있다니, 그것조차 참 자기다운 꽃인 것 같아 마음에 든다. 당연한 얘기지만 불확실함에 흔들리는 감정은 살아있는 것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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