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Ranunculus (라넌큘러스)
브런치에 연재된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이제 서점에서 만나요!
February: Ranunculus
나는 습자지처럼 얇은 꽃잎이 셀 수 없이 겹겹이 쌓인 라넌큘러스(Ranunculus)를 좋아한다. 아주 오랫동안 내가 사랑하는 꽃 No.1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꽃이다.
땡땡한 얌체공처럼 작은 봉오리의 라넌큘러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얇은 꽃잎을 한장 한장 펼치며 우아한 얼굴을 드러낸다. 이렇게 많은 꽃잎이 이 작은 봉오리 안에 들어 있었나싶게 놀랍다. 그리고 대체로 봉오리의 상태로 사도 잘 피어나는 꽃 중 하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꽃을 살 때 활짝 핀 꽃보다 곧 피어날 봉오리를 사고 싶어한다. 만개한 꽃보다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활짝 피어나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봉오리 상태 그대로 시드는 꽃도 많다. 사람도 그렇지만, 꽃도 늘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봉오리부터 만개한 상태까지 모두를 보여주는 라넌큘러스는 플로리스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주 기특하고 만족스러운 녀석이라고 할 수 있다.
라넌큘러스 (Ranunculus)
그럼 라넌큘러스가 질 때는 어떤가.
라넌큘러스는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더 활짝 벌어져 귀를 뒤로 젖힌 강아지처럼 그 얇디 얇은 꽃잎을 빠짐 없이 모두 펼쳐보인 다음, 순식간에 모든 꽃잎을 화르륵 떨어 뜨리고 져버린다. 그래서 어젯밤만 해도 만개한 화려한 꽃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막대기 같은 줄기만이 꽃병에 꽂혀있고 섬세한 꽃잎들이 수북히 바닥에 쌓여 있는 광경을 자주 본다. 그럴때면 나는 라넌큘러스라는 책 한권을 읽고 덮은 기분에 빠지곤 한다.
기특한 라넌큘러스는 내가 꽃시장에서 발견한 작고 둥근 공같은 모습에서부터 점점 부풀어 피어나는 모습, 숨을 멈출만큼 풍성한 순간, 그리고 미련없이 작별을 고할 때까지 아주 분명한 기승전결을 보여준다. 라넌큘러스의 모든 순간은 라넌큘러스의 것이다. 그 벅찬 순간, 나도 무언가를 거들고 싶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겨우 매일 꽃병을 깨끗이 닦고, 시원한 물을 넣어주는 정도의 것 뿐이다.
거창한 마음으로 이런 저런 계획들과 함께 1월을 시작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지 않아 2월의 시작과 함께 사라질 때가 많다. 올해가 시작된지도 얼마되지 않았는데 마치 죽자마자 인생 2회차를 시작한 사람처럼 쉴새없이 달려온 기분이 든다.
하지만 지친 기분과는 다르게, 돌아보면 남아 있는 흔적이 거의 없다. 나는 그저 머리속으로만 가열찬 인생을 살았을 뿐.
그 괴리가 현타로 다가오고, 그리고 나면 연초부터 슬럼프에 빠지는 건 시간문제다.
무언가 잘 풀리지 않는 내게, 사람들은 너무 쉽게 '이런 걸 해보면 어때?', '저런 건 아직 안해봤지?', '이런 것들이 요즘 트렌드라던데.'라며 한마디를 보탠다.
아니, 당신이 알지 못할 뿐 나는 그것을 해 보았고, 저런것도 이미 시도해 보았으며, 그 트렌드라는 건 이미 몇년전부터 알고 있었어. 아무렇지않게 웃으며 넘기지만 어쩐지 어색하게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 내 안에서는 신경질적인 마음의 소리가 끄응,하는 한숨과 함께 훅 올라왔다가 사그라든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내가 모르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기분이 상한다.
쭈구리가 되어 뜨끈하고 어두운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 넷플릭스 영화 목록이나 훑어보며 시간을 죽이고 싶은 유혹과 싸우며 내가 떠올리는 건, 분명한 기승전결을 가지고 자기라는 책을 스스로 열고 닫던 라넌큘러스였다.
지금 나는 마치 얌체공만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라넌큘러스 봉오리일지도 모른다. 그 안에 얼마나 풍성한 내용이 숨어 있는지 아직은 알 수 없는. 하지만 땡땡한 봉오리의 첫 잎은 오직 나만이 열 수 있다. 누군가의 조언도, 경험도, 비난과 협박도 소용이 없다.
사람들은 도전을 멈추고 그냥 포기하는 사람에겐 관대하지않다. 포기하기까지의 과정을 속속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날이 선 비난과 모욕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선을 넘은 오지랖도 쉽게 부린다. 하지만 다행이도 실패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관대한 편이다. 그러니 내 스스로 이 시작 페이지만 넘기면, 그 다음은 조금 더 수월해질 것이다.
나는 속을 감춘 작은 봉오리, 한장 한장은 보잘 것 없는 얇은 꽃잎이다. 하지만 천천히 시간을 들여 모두 펼치고 나면 그땐 알 수 없었던, 나를 멈추게 했던 어려운 그 부분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 이 모든 과정의 한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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