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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단톡방마다 불이라도 난 듯 쉴 새 없이 메시지가 와서 무슨 일인가 싶어 휴대폰을 열었는데, 어머나, 그럴 만했네요. 믿을 수 없는 일,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어요.
우리나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 언젠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탈 것이라고 짐작했던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것이 올해일 것이라는 예측한 사람이 드물었다고 합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만큼 화제성이 엄청났습니다.
누가 우리나라 독서율을 걱정했던가요,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나자마자 YES24, 알라딘 등 주요 온라인서점은 트래픽이 몰려 서버가 다운됐습니다. 밤사이 한강 작가의 책은 13만부나 판매되었고, 스웨덴 한림원이 수상자를 발표한 지 만 하루만도 채 되지 않아 예약판매는 15만부나 이루어졌습니다. 다음 날 오프라인 서점은 오픈 시간부터 줄을 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서점과 도서관에서 한강 작가의 책이 증발이라도 된 것처럼 사라졌죠.
책을 좋아한다고 쉴 새 없이 고백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책을 많이 사는 사람이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까지 했으니, 이쯤 되면 이제 제가 읽은 한강 작가의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좋겠습니다만, 어쩌죠? 저는 한강 작가의 책이 한 권도 없습니다. 읽어본 책 역시 단 한 권도 없어요. 한강 작가를 몰랐던 것도 아니고, 작품들에 대해서도 들어 알고 있지만 직접 읽은 적은 없습니다.
저는 자칭 ‘쉬운 독자’입니다. 저로 하여금 어떤 책을 읽게 만드는 건 대단히 쉽고 간단하니까요. 별것 아닌 한 마디에도 손쉽게 설득됩니다. 출판사가 파놓은 마케팅의 덫은 그냥 제 발로 찾아 들어가는 수준이며, 평소 신뢰하던 인스타그래머나이나 블로거의 책 리뷰를 읽고 나면 거의 무비판적으로 그 책이 좋아집니다. 표지나 내지 디자인이 예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집에 들이기도 하고, 단 한 챕터가 궁금해서 책을 사거나 빌리는 일도 부지기수. 베스트셀러는 베스트셀러대로 궁금하고 스테디셀러는 스테디셀러여서 읽고 싶은(나만 안 읽을 순 없잖아!) 이런 얄팍한 귀의 소유자인 제가 한강 작가의 책을 읽지 않은 건 뒷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입니다.
한강 작가의 책을 읽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합니다. ‘좋은 책인데, 읽는 동안 너무 힘들었다.’ ‘와, 대단한 책이다. 그런데 이후에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웃긴 책도 좋아하고, 슬픈 책도 좋아하고, 심심한 책도 좋아하지만 저는 마음이 아픈 책은 잘 못 읽어요. 책을 견디듯 읽는 걸 즐기지 않습니다. 세상엔 견디며 알아가는 마음도 있다는 걸 알지만, 이왕이면 다른 방식을 택합니다. 책을 견디면서까지 읽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내 삶에 있어 책의 역할은 ‘즐거움’으로 한정하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겁이 나서 여태 한강 작가의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5.18민주화운동기념일이 다가올 때마다 <소년이 운다>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했고, 8년 전 맨부커상을 받았을 때는 <채식주의자>를 오랜 시간 장바구니에 넣어두기도 했습니다. 저처럼 쉬운 사람이, 읽고 싶지 않았을 리 없잖아요. 하지만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저는 “어떤 종류의 책을 좋아하세요?” 이런 책의 취향을 묻는 질문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분명 저도 취향이란 게 존재하긴 하겠지만 칼로 무 자르듯 잘라 말하기 쉽지 않아요. 가장 많이 읽는 건 에세이지만 “에세이를 좋아해요”라고 이야기하기엔 제가 사랑했던 소설들이 아쉬워할 거 같고, 둘을 묶어 문학이라고 이야기하자니 인문서나 예술서도 틈틈이 보고 있고, 자기계발서도 좋아하는데 말입니다. 저 질문에 대한 가장 가까운 답은 “저는 책이라면 다 좋아하는데요?” 라는 무취향임을 스스로 밝히는 답밖엔 없을 것 같습니다. 저 쉬운 독자 맞지요?
하지만 저는 제가 쉬운 독자라서 좋습니다. 책에 관한 한 까다롭지 않아서 남들보다 많은 책을 접하고 산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이 쉬운 독자가 이제 곧 레벨 업을 하려고 합니다. 한강 작가님 책을 드디어 읽어보려고 해요. ‘마음이 불편한 책은 싫다’고 싫다며, 맨부커상의 달콤한 속삭임도 뿌리치고 다른 사람들의 귀가 쫑긋하게 만드는 호평도 애써 무시했지만 ‘노벨문학상’의 꾐에는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네요. 노벨문학상이잖아요. 같은 나라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노벨문학상 작가의 작품이잖아요.
앞서 이야기했던 예약판매로 판매되었다는 15만 권의 책 중 두 권은 제 책임을 밝힙니다. <소년이 운다>와 <희랍어의 시간>을 먼저 읽어보고 나머지도 차례로 읽어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아주 아주 힘겹게 읽어나가겠지만, 결론은 이미 알고 있어요. 반하겠죠. 금사빠 쉬운 독자에게 다른 결론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이로서 저는 쉬운 독자에서 ‘더 쉬운 독자’가 될 예정입니다.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거죠? 기분이 좋은 걸 보니, 맞네요, 레벨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