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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Jul 18. 2024

어느 불행한 탄생의 노래

mayol@행화촌 8. 김수한 추기경이 간직한 한 권의 시집

 시인 서정슬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출생 직전 산모의 실수로 불구로 태어난 여류시인이다.

 고 김수한 추기경이 '내 품에 안고 갈 단 한 권의 시집이 있다면 서정슬의 시집이 그것이다.'라고 했던 시집이 바로 이 시집이다.

 시인 서정슬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이번 시리즈에서는 객관적인 서문과 후기만을 소개하는 것이므로 사견은 되도록 배제하려고 한다.

 아주 짧은 사견을 한마디 붙인다면, 일본의 가네코 미스즈의 시집보다 더 많은 감동을 안겨준 시집이라는 것이다.

    

    차례


    1. 봄

    선인장 / 보슬비 / 봄볕 / 봄은 병아리 / 태풍 / 봄비(1) / 봄비(2) / 봄날 / 푸른 우산 / 이슬비 / 빗방울 / 밤새 몰래 / 유리창 / 친구에게

    2. 여름

    해바라기 / 오월(1) / 오월(2) / 여름 / 여름 오후 / 바람 / 하늘을 보면 / 솜사탕 / 아침 / 소나기 / 바람 없는 날(1) / 바람 없는 날(2) / 꿈 / 발소리 문소리

    3. 가을

    몽실몽실 빠각빠각 / 가을의 시 / 비온 뒤 / 바람 / 구름 / 초가을 / 열매 목걸이 / 회오리 바람 / 알 암 / 낙화 / 햇빛 / 연습장 / 바람과 냇물

    4. 겨울

    도레미 / 겨울 / 하얀 성 / 눈 위에다 / 겨울밤 / 고드름 / 눈온 날 / 추운 날 / 추운 아침 / 눈 / 심심한 오후 / 내게로 오렴 / 그림자

    5. 기다림

    오늘 쓴 시 / 잊어 버렸다 / 기다림 / 밤(1) / 밤(2) / 아침 / 시간 / 길 / 허무 / 어머니 / 눈(目) / 소녀의 기도 / 내가 걸을 수 있다면 / 벗에게



    서문

    천부적 시심詩心과 투명한 영혼의 창 - 홍윤숙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가 여기 있읍니다.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그 어머니의 캄캄한 태속에서 아직 눈도 뜨기 전에 이미 탄생의 축복과 기쁨 대신에 가혹한 형벌과 운명이 그 작은 생명 위에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선천성 뇌성마비'라는 무서운 십자가가 이미 그 작은 생명에 짐지워져 있던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세상에 있어야 하는 것인지, 누구의 잘못으로 이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런 경우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누구도 분명하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읍니다. 참으로 하느님은 이따금 엄청난 불행을 인간에게 서슴없이 행사하십니다. 까닭없이 무거운 질병으로 괴롭히시기도 하고 예기치 않은 불행과 고통을 준비하시기도 합니다. 욥의 수난기를 통해 하느님의 시험이 어떤 것인가를 짐작하고는 있읍니다만, 그러나 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은 하느님의 큰 계획을 헤아릴 없어 그저 엄청난 사실앞에 당황하고 놀랄 뿐입니다.

    여기 이 아름다운 노래의 주인 서정슬씨도 바로 그렇게 엄청난 십자가를 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남처럼 걸을 수도 말할 수도 없을 뿐더러 끊임없이 일어나는 경련성 마비로 손조차 제대로 가누기 힘든 지체 부자유한 몸입니다. 그렇건만 그의 천부적 시심詩心과 불굴의 의지는 주옥같은 시어를 알알이 빚어내어 떨리는 손으로 한 자 한 자 탄생케 하였읍니다. 들어 보십시오. 그 시심의 맑은 투명함을, 시어의 황홀한 협주協奏를.


    가을이 몽실몽실 구름이 되어 / 하늘을 빠각빠각 닦아 놓고 / 가을이 빠알갛게 불꽃이 되어 / 고추밭 나뭇잎들 활활 태우고 / 가을이 살금살금 요술을 부려 / 가시뭉치 알암을 떨어뜨리고 / 가을이 또르르 구슬이 되어 / 달빛을 타고서 맴을 돕니다. (가을)


    키다리 아저씨 무얼 보셔요 / 담 너머 고개 빼고 / 무얼 하셔요 / 담 너머 이웃마당 / 꽃을 본단다 / 봉숭아 아가씨와 얘기한단다 (해바라기)


    참으로 신선하고 놀라운 감각입니다. '빠각빠각' 소리가 나도록 닦여서 유리알처럼 맑아진 가을 하늘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그리고 둥근 얼굴에 키가 큰 해바라기, 담너머 이웃집을 넘겨다 보고 있는 듯한 그 훌쩍 큰 모습에서 마음씨 좋은 아저씨를 보는 듯하지 않습니까. 사물을 보는 작자의 마음이 ⌜가을⌟에서는 청아한 구슬처럼 맑고, ⌜해바라기⌟에서는 훈훈하게 따뜻하고 정답습니다. 어느 구석에도 어둡고 슬픈 그림자가 없읍니다. 기쁨과 놀라움으로 사물을 발견하고 따뜻한 사랑과 밝은 정서로 그 하나하나를 생명에 가득 차게 하고 있읍니다.

    서정슬씨는 보행에도 부자유한 몸이므로 겨우 연세대 의대 부속 자활원에서 국민학교 소정의 과정을 단기로 마쳤을 뿐의 학력밖에 없읍니다. 그러나 그의 시의 빛남과 아름다움은 천부적으로 뛰어나 특유한 개성의 감동을 줍니다.


    잊어버렸다 / 내가 왜 싸웠는지를 / 잊어버렸다 / 내가 왜 울었는지를 / 새들이 왜 날아가는지 / 잊어버렸다 /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이유를 / 잊어버렸다 / 잊어버렸다 / 잊혀지는 것을 (잊어버렸다)


    정상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없는 작자는 별 수 없이 늘 한구석 외딴 곳에 떨어져 있어야 하고 그러다보니 어느덧 가족들의 관심 밖으로 잊혀져 버리고 있는 사실을 어느 순간 문득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슬픈 발견입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아픔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서정슬씨는 놀랍도록 간결한 솜씨로 감상을 배제하고 내부의 깊은 비애를 객관화하고 있읍니다. 이것은 동시의 범위를 벗어난 높은 인식의 경지로 삶과 생명의 깊은 오지奧地에까지 다다른 투철한 시심의 극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줄 압니다.


    달력을 본다 ... 달력을 본다 ... 달력을 본다 ... / 시계를 본다 ... 시계를 본다 ... 시계를 본다 ... (기다림)


    마지막 낙엽을 떨어뜨리며 / 기어들었구나 / 고양이처럼 ... (겨울)


    거미 한 마리 / 은구슬을 낚는다 (보슬비)


    물론 이러한 형태의 시가 특별한 감각을 요하는 것으로 자칫 유희처럼 가벼워질 우려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여기 서정슬씨의 시에선 달력과 시계란 매개체를 통해 기다림의 가장 절실한 얼굴을 특이한 직관으로 잡아내는 솜씨며 겨울을 ⌜마지막 낙엽을 떨어뜨리며 몰래 기어드는 고양이⌟로, 보슬비를 ⌜은구슬을 낚고 있는 거미로⌟ 잡은 감각적 능력 등 실로 그 뛰어난 감성과 직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읍니다. 이러한 순수직관이란 얼마간 시적 중독에 걸린 시인 독자들에게 하나의 충격이 아닐 수 없읍니다. 그것은 티없이 맑은 영혼의 거울이 아니고선 비쳐질 수 없는 사물의 숨은 모습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정슬씨의 영혼은 바로 천상적 빛과 청정함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읍니다.

    - 중략 -

    진실로 이 한권의 시집이 행복한 이들에겐 더욱 맑게 샘솟는 음악이 되고 불행한 이들에겐 아픔을 씻어주는 유약이 될 것을 나는 믿습니다.



   ▶︎ 내게로 오렴


    누가 너를 울릴까

    추워 떠는 강아지야

    내게로 오렴


        누가 너를 울릴까

        엄마 찾는 병아리야

        내게로 오렴


    누가 너를 울릴까

    내게로 오렴

    갈 곳 없는 친구야



   ▶︎ 소녀의 기도


    제가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개미를 한 마리 죽인 일이 있어요

    그 개미는 사람을 무는 놈이었어요

    팔, 다리를 따끔따끔 물길래

    손가락으로 꼬옥 누른 거예요


    제가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지렁이를 한 마리 죽인 일이 있어요

    그 지렁이는 눈이 없는 장님이었어요

    세수를 하다 보니 발밑에 있어

    깜짝 놀라 밟아 버린 거예요


    제가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귀뚜라미 다리 하나 뗀 일이 있어요

    그놈은 방안이 운동장인 줄 알았나봐요

    펄떡펄떡 뛰다가 앉아 있길래

    가만히 뒷다리를 잡았더니 떨어졌어요


    그보다 훨씬 전, 아주 어릴 때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이 세상에 오기 전에 하느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런 고통을 주셨을까요

    왜 이런 괴로움을 받아야만 하는 걸까요



   ▶︎ 벗에게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날아 갈까요

    날아가다 골짜기에 살짝 내려서

    수풀 속에 산딸기랑 따먹으면서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날아 갈까요


    조그만 돌이 되어 굴러 갈까요

    길손들의 발길마다 채이고 밟혀

    수레바퀴 밑을 따라 구경하면서

    조그만 돌이 되어 굴러 갈까요


    한 조각의 구름 되어 흘러 갈까요

    여름 한낮 하늘에 그림 그리다

    비가 되어 여기저기 흩어지면서

    한 조각의 구름이 되어 흘러 갈까요


    한 줄기의 빛이 되어 달려 갈까요

    가는 길마다 솟은 산을 넘어서

    넘실대는 물새 타고 바다 건너서

    한 줄기의 빛이 되어 달려 갈까요


    어느날 아침에 그대 창가에

    한 마리의 새가 앉아 지저귀면은

    그리운 벗이여, 불러 주세요


    안개낀 길을 가다 구두발 끝에

    조그만 둘 한개가 뒹굴거든

    허리 굽혀 살그머니 집어 주세요


    소나기가 지나간 뒤 그대 머리 위

    흰 구름 한 조각 맴을 돌거든

    벗이여 어서 오라 반겨 주세요


    어둠이 주머니 속까지 가득 찰 때에

    반짝이는 빛 한 줄기 보이거든

    마음 깊이 가만가만 담아 주세요



    후기後記


    한 조각 구름이 되어

    푸른 하늘을 흘러가 봤으면

    한 마리 비둘기 되어

    숲속을 날아 봤으면

    한 마리 사슴이 되어

    들판을 뛰어 봤으면

    동네 아이들이 줄넘기를 하는구나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구나

    엄마 손잡고 나들이 가는 아이들


    간절한 소망과 선망은 나를 슬프게 했읍니다. 30성상의 세월은 원망스럽고 지루했읍니다만, 하느님께선 내가 알게 모르게 지켜주셨고 이끌어 주셨읍니다.

    한 조각의 구름이, 한 마리의 비둘기가, 또 한 마리의 아기사슴이 되어 푸른 하늘을 만져 보기도 하고 바람 사이를 날아 보기도 하고 넓은 들판을 달리기도 했으빈다. 때론 아무도 봐 주지 않는 바위틈의 이름없는 작디작은 풀꽃이 되어 내리는 이슬을 먹으며 밤하늘의 화창한 별들의 수를 세기도 했지요.

    순간순간의 슬픔과 갈등 속에서도 나는 이들을 내 안에 모아들여서 벗했어요. 조그만 창으로 들어오는 화사한 햇살, 어둔 밤을 부서뜨리는 비단같은 달빛, 한꺼번에 쏟아져 내릴 듯한 별무리들, 이들의 따뜻함을 하느님은 내 마음에 담아주셨고 이들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게 해주셨기에 나는 외롭지 않으면서도 외로왔고 슬프지 않으면서도 슬펐읍니다. 숱한 사람들이 내 모습에 던지는 보이지 않는 화살이 너무나 아팠읍니다.

    사람들은 불편해 보이고 불안스러워 보이는 신체 장애자들을 육체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타인들뿐만 아니라 신체 장애자들 자신 스스로도 자포자기해 버리는 바람에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는 능열까지도 소멸되어 정말 헤어날 수가 없는 장애자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주위에서 때때로 보아오면서 나는 소리없는 울분을 느끼곤 했읍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을, 삶을, 옆으로 제쳐버리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왜 그런 슬픔을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까?

    하긴 나 역시 그들과 같이 스스로의 담을 쌓았던 때도 있었지만 올바른 삶을 추구하며 기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기에 나 스스로 뭔가를 하고 싶을 때마다 낙서처럼 그리기도 하였고 혹은 콧노래처럼 흥얼거리기도 했읍니다.

    - 중략 -

    홍윤숙 선생님께서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금새 날아가고 지워져 버릴 것같은 나의 보잘것 없는 작은 낙서들, 타인들 귀에는 들리지 않을만큼 약한 콧노래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드시겠다고 하셨을 때 나의 마음은 부끄러움과 두려운 그리고 감사함이 엉켜서 무어라 표현하기가 힘들었읍니다. 작고 조그만 발로 뒤뚱거리며 몇발짝 떼어 놓다가 넘어지며 그때마다 다시 일어나 손을 벌려 반짝이는 햇빛을 따라가는 약한 내 마음이 나 아닌 많은 신체 장애자들에게 티끌만큼의 힘이라도 될 수 있다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책이 나오기까지 바쁘신 틈에도 여러 면으로 힘써 주시고 격려해 주신 홍윤숙 선생님께 머리숙여 감사드리며 원고정서를 도와준 ⌜사랑의 고리⌟ 공동체 자매님들과 출판사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 ⌜사랑의 고리⌟ 집에서 서정슬

이전 07화 한알의 씨,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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