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안을 살펴보다 03
호주로 이주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나는 다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나는 42세였고, 많은 사람들이 겪듯이 나에게도 가장 큰 도전은 기억력이었다. 아무리 영어 단어를 외우려 해도, 며칠만 지나면 어디론가 흩어져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래서 나는 가장 느리지만, 가장 견고한 길을 택하기로 했다.
매일 아침 필사와 독서로 하루를 시작했다. 영어 문장을 하나하나 따라 쓰며, 영어 원서를 한 장씩 넘기며 단어와 문장들을 내 몸에 새기듯 익힌 것이다. 그 과정은 마치 고요한 숲 속을 천천히 거닐며 나무의 결을 하나하나 손끝으로 느끼는 것과 같았다. 내 삶이 늘어지듯 느리게 흘러가는 과정은 무척 천천히 진행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방법은 단지 언어를 배우는 것을 넘어 내 삶 속 깊숙이 자리 잡았다.
6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 느린 학습법이 가장 확실하고, 가장 넓고, 무엇보다 가장 오래 지속될 수 있는 방법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필사와 독서를 통해 영어 단어를 익히는 과정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세상의 언어를 배워가는 과정과도 같았다. 아이들은 모국어를 습득하듯이,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상황 속에서 반복적으로 노출된 단어들을 무의식 속에 쌓아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큰 자극으로 그 단어의 뜻이 나에게 선명히 다가오는 순간, 비로소 그 단어는 내 것이 되며 그때부터 그 단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내가 일상 속에서 특별한 순간을 맞이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이는 단순히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저 일상의 흐름에 나의 몸을 맡기고, 반복되는 동작 속에 묻혀 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나 이 반복 속에는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중요한 과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작은 경험들이 서서히 쌓여가며, 나의 무의식 속에 서서히 스며든다. 그것들은 한 겹, 한 겹 쌓이며,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지혜라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 과정을 통해, 스쳐 지나간 수많은 찰나의 순간들에 점점 더 많은 의미를 담는 방법을 배우는 듯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그동안 쌓인 경험들은 어느 순간 하나의 큰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마치 수천 번의 점이 연결되어 하나의 그림을 이루는 것처럼, 반복적인 일상은 특별한 계기로 하나의 큰 깨달음으로 이어지며, 이는 내 안에 이미 깊이 자리 잡고 있던 경험들과 결합하여, 또 다른 나만의 지식과 지혜로 확장된다.
이는 영어 습득과도 유사하다. 처음에는 매일매일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언어의 기초를 다지며, 그 과정이 느리게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 언어가 내 것이 되어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나의 경우에도 글을 쓰며 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그림을 그리며 나의 철학을 담고, 아이들과 대화를 하며 나의 아이디어와 감정을 나누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이 모든 경험들이 서로 연결되어 나만의 독창적인 지식과 지혜로 확장된다.
이러한 경험들은 서로 시너지를 발휘하며, 또 다른 자극으로 돌아온다. 이제는 끊임없는 연결이 시작된다. 매일의 반복적인 경험이 나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 이로 인해 계속해서 나의 생각과 행동에 변화를 주며,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의 작은 경험들이 어떻게 나의 큰 깨달음으로 이어지는지,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이 어떻게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스스로 자라고 있음을 알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아이는 초원에 갓 피어난 삼백초처럼 천천히 흘러가는 나날들이 자신을 흠없이 성숙시켜 주기를 다소곳하게 기다린다. 마치 바람이 부채질하고, 비가 물을 주고, 자연이 교육하는 것만 같다. - 소로(주)
(주) 소로의 일기, 핸리 데이비드 소로, 갈라파고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