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수님 우리 머리 좀 식히고 올까요?
원래 예정된 한 시간을 훌쩍 넘겨서 7월 리뷰 회의가 끝났다. 퇴근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더 이상 일을 할 수 있는 집중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소라님이 자기 자리에 노트북을 올려놓고는 너무나 간절했던 잠깐의 휴식을 제안했다.
좋아요. 아니 그냥 이렇게 나가서 집으로 가면 안 될까요?
소라님이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얼른 나가자고 했다. 처음엔 바깥공기도 마실 겸 사무실 건물 옥상에 마련된 그늘막에 캠핑 의자를 펼치고 앉아있으려 했는데, 그러기엔 오후 5시에도 햇빛이 뜨겁게 쏟아져 내렸다. 로비로 내려가서 둘이 동시에 털썩 소파에 앉았다.
지수님 저 이번 달까지 다니기로 했어요.
소라님의 느닷없는 퇴사 고백에 깜짝 놀라 소파에 기댔던 몸을 곧게 세웠다. 물론 최근 회사의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진심으로 퇴사를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엊그제 오퍼를 받아서 아까 오전에 민재님한테도 이야기했어요.
와, 소라님, 나한테 아무 말도 없이 언제 이직까지 준비하고 계셨어요? 이렇게 날 남겨두고 가시다니.. - 눈물을 닦는 연기를 한다 - 장난이에요. 축하드려요! 어디로 가세요?
저, 주원님(패션팀 이전 팀장님)이랑 다시 같이 일하기로 했어요. 얼마 전에 연락하다가 거기 3-4년 차 새로 뽑고 있다고 해서 바로 면접 보고. 순식간에 진행됐어요.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결정이었다. 소라님이 주원님과 일할 때에는 이렇게까지 힘들어하지는 않았으니까.
오전에 민재님과 면담하는데 본인의 리더십이나 업무 성향과 맞지 않을 수 있다고 스스로 얘기하더라고요. 내가 적응을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도움을 주려고 했다나? 저는 그게 오히려 부담스러웠거든요.
역시 이 결정의 계기는 민재님이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라님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봐도 지수님은 민재님 스타일에 잘 맞는 것 같아요. 저는 그걸 못 따라가는 거니까, 지수님은 더 많이 배우고 더 잘 나가면 좋겠어요. 민재님보다 더 잘 나가는 리더가 돼요!
소라님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툭툭 쳤다. 남겨진 자를 위한 소라님의 희망찬 –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를 - 응원에 함께 웃기는 하지만 가장 가까웠던 동료가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직은 직장에서의 이별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2.
소라님이 담당하시던 업무는 두 분이 나눠서 진행해 주세요. 이번에 채용하는 인턴을 우선적으로 저희 팀에 두 명 배정해 달라고 HR에 요청해 둔 상태니까 인턴 들어오면 두 분 업무 서포트할 수 있게 다시 정리할게요. 신발이랑 잡화는 공용이 많아서 공용 쪽에서 같이 해주시면 될 것 같고, 가방은 여성 쪽에서 추가로 관리해 주시고요.
그렇게 하면 남성 쪽이 일이 너무 많아지는 거 아닌가? 속으로 생각하며 담당자인 영찬님의 얼굴을 보니 표정이 좋지 않다.
지수님은 가방만 맡는 대신에 한 가지 롤(role)을 추가로 드릴 거예요.
그럼 그렇지. 내가 하게 될 역할의 설명을 들으니 카테고리를 더 맡는 게 훨씬 쉬워 보인다. 얼굴이 다시 밝아진 영찬님이 이제는 내 눈치를 보고 있다.
3.
프로젝트를 함께 할 TF(Task Force: 태스크포스, 특정 업무나 목표 달성을 위해 임시로 조직된 팀으로 본래 조직에 그대로 속해 있으면서 추가로 해당 업무를 진행한다) 팀이 처음으로 모이는 날이다. 오늘은 우리가 할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민재님이 해주시기로 했다.
여러분은 기존고객의 이탈을 막기 위해 모인 정예 요원들이에요. 여기 전사 지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년 대비해서 신규고객의 유입이 줄어들면서 MAU(Monthly Average User: 월평균방문자수)가 정체되고 있어요. 하지만 워낙 업계의 CAC(Customer Acquisition Cost: 고객획득비용. 신규고객 1명을 확보하는 데 들어가는 모든 비용)가 높아지고 있어서 신규고객 유치에 리소스를 투자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경영진에서는 기존고객의 유입부터 구매 단계에 이르는 전체 사용 경험을 개선하고 최대한 구매전환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집중하기로 했어요. 카테고리에 따라서 고객의 성향이 다르고 취해야 할 전략도 다르게 도출될 것이기 때문에 카테고리별로 분석이 필요해요. 서로 비교하면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고요. 그래서 각 팀에서 가장 잘하시는 분들로 제가 데려왔어요.
민재님은 전사 MAU 지표를 보여주던 태블로 창을 닫고 파워포인트를 열어 화살표 모양과 비슷하게 생긴 도형을 5개를 그렸다.
고객이 우리 앱에 유입된 이후 상품을 탐색하고 구매하고, 사용 후에 재구매까지 이어지는 전체 경험을 도식화한 프레임워크예요. 여러분은 매출이 안 나오면 할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죠?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답이 될 수도 있고 틀린 답이 될 수도 있어요. 매출은, 바꿔 말하면 고객의 구매는 여기 프레임워크 상의 앞 단계들에서 이탈하지 않고 꾸준히 이어 나가서 마지막 단계에서 결제를 했을 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전 단계의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돼요. 그래서 여러분이 앞으로 두 달간 프로젝트를 통해 각각의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전환율이 얼마인지, 전사 평균이나 다른 카테고리 대비 전환율이 낮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원인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세요. 아마 할인이 다가 아닐 거예요. 다양한 해결책을 생각해서 실행해 보세요.
민재님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다른 팀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거라고 마케팅, 개발, 데이터분석팀에 우리 프로젝트를 도와줄 담당자를 한 명씩 지정해 줬다 – 요청할 때는 자기를 꼭 cc.(이메일, 메신저 등에 참조로 넣는 것)를 넣으라는 말과 함께.
4.
다음 날, 우리끼리 한 번 더 만나기로 했다. 회사 전체 전환율 지표는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카테고리별이나 상품별로 세분화된 지표가 없어서 데이터팀에 요청을 해야 했다. 그래서 각자 필요한 데이터들을 정리해서 한꺼번에 요청하기로 한 것이다.
지수님은 커피 안 드시죠? 주스로 사 왔어요.
원님이 – 리빙팀 대표로 원님이 TF에 참여하고 있다 – 프로젝트 팀원들을 위해 커피를 사 왔다. 나머지는 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통일인데, 내 것만 청포도주스다. 지난번 소라님이랑 셋이 밥 먹고 카페에 갔을 때 내가 커피 못 마신다고 주스를 주문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문득 소라님이 ‘로맨스의 촉이 온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소라님은 괜히 그런 말을 해서 나를 착각하게 만든다.
민재님이 담당자를 지정해 주긴 했지만, 생각보다 협조적이지는 않다. 특히 개발팀과 데이터분석팀은 이미 우선순위 업무들이 많다면서 우리가 요청한 기한보다 하루이틀 늦게나 가능하다고 한다.
저.. 요것들은 원래 있는 데이터마트에서 추출만 하면 돼서 제가 한번 뽑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뷰티팀의 유현님이다. 이번에 TF 하면서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애니메이션 ‘인사이드아웃’의 ‘슬픔이’ 같은 인상 – 귀엽다는 뜻이다 – 에 말투도 비슷한데 말씀하시는 내용은 엄청 스마트하다. 어떻게 또 데이터 추출까지 할 줄 아시는 걸까?
회의 끝에 처음 민재님이 보여줬던 5단계 구매여정 프로세스보다 좀 더 세부적으로 단계를 나누어서 분석해 보기로 했다. 결제 전에 ‘장바구니’ 단계를 추가했고, 결제 이후에 ‘사용 및 재구매’ 단계를 추가했다. 나 또한 우리 쇼핑몰의 고객으로서 어떤 순서로 앱에서 행동하는지를 돌이켜봤을 때,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고민하다가 결제하지, 바로 상세페이지 보고 결제 버튼을 누른 적이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유현님은 구매주기가 짧은 뷰티 카테고리 특성상 – 몇 년씩 입는 옷, 몇 년씩 쓰는 가구가 있는 것과 달리 화장품은 용량과 유통기한이 있다 - 재구매 단계까지 넓혀서 보면 기존고객 경험을 관리할 수 있는 더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올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리 프로젝트 이름은 ‘집토끼 지키기 대작전’으로 부르기로 했다.
5.
‘재구매’ 배지(badge) 내일 12시부터 노출됩니다.
우와 원래 금요일부터 아니었나요? 빠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실행된 전략들 중 몇 가지가 구매전환율을 크게 개선했다. ‘집토끼 지키기 대작전’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다른 팀의 협업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그들의 우선순위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고객구매여정의 전환율을 보면서, 왜 장바구니 단계에서 고객들이 구매를 안 하고 이탈했을까? 를 고민하면서 우리 서비스에서 패션 상품을 둘러보는 고객 한 명 한 명에게 빙의를 했다. 어떤 상품은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바로 구매하고, 어떤 상품은 계속 남겨두고, 어떤 상품은 넣었다가 삭제하고. 이렇게까지 고객 행동 데이터를 깊숙하게 본 적은 없었다 - 아니 사실 그 데이터를 보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고객을 따라다니면 답이 보인다는 말은 정말 사실이었다.
장바구니에서 바로 구매하는 상품과 그렇지 않은 상품의 차이를 분석했을 때 가장 상관관계가 높은 요인이 ‘사이즈 옵션의 유무’였다. 사이즈 옵션이 없는 상품의 경우 구매전환율이 높았다. 하지만 사이즈 옵션이 있고 또 옵션이 다양할수록 구매전환율이 낮아지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우리 앱에 들어와서 패션 상품의 후기를 보면 후기를 남긴 고객의 체형정보를 볼 수 있고 내 체형정보에 맞는 후기를 필터링해서 볼 수도 있다. 나와 체형이 비슷한 고객의 착용후기를 통해 사이즈의 불확실성을 어느 정도 해소해 준 것이다.
'집에서 새어 나갈 뻔한' 토끼들을 다행히 잘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