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날 내리는 상서로운 눈

체납납부안내문자

by 하기


서설(瑞雪)


사박사박 소리에

이미 그려지는 얼굴


행여하는 마음에

새로 산 게스 청바지를 입고


아직 인화하지 못한 필름이 남아 있는

FM2 사진기를 들고 길을 나선다


익숙한 골목길에서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

밤 세워 너를 기다린다


오래 전 그 밤처럼




체납납부 안내문자


12월 1일 엔티스 GB0I 화면에

다수의 신규체납자가 발생했다.


독촉장을 발송 후 GB01 화면에서

체납납부 안내문자를 보낸다.


“국세체납액에 대한 안내입니다.

김**님께서는 현재 중랑세무서에

국세 1건 15,106,490원이 체납되어 있습니다.

미납부 시에는 재산 압류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므로

체납액을 조속히 납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이고

누군가의 배우자이며 아들, 딸인 그들에게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누군가의 남편이며 아들인 나는

그들이 체납자라는 이유로

체납액 납부를 독촉하고

그들의 재산현황을 조사하여

압류 재산목록을 작성한다.


그들이 이루어낸 그동안의 성과와 공로는

체납자라는 이름으로 덮어두고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견뎌야 할 모욕과 인내만이

엔티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잔의 믹스커피를 마시고

나는 다시

모니터의 GB01화면으로 돌아온다.


“국세체납액에 대한 안내입니다.

신**님께서는 현재 중랑세무서에

국세 1건 13,999,760원이 체납되어 있습니다...”




아랫목


그 시절 아랫목은

오래되고 낡은 놋그릇 차지였다.


그 놋그릇에는 퇴근 후 아버지가 드실

하얀 쌀밥이 수북히 담겨있었다


밥그릇 옆으로 사남매는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겨울에만 꺼내놓는

빨간색 캐시미어 이불이

덮여있던 아랫목에

사남매는 서로 따뜻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몸을 부대끼며 싸우곤 했다


전쟁의 결과는

언제나 가족 서열 순이었다

큰형 큰누나 셋째 순으로 아랫목을 차지하면

막내에게는 캐시미어 이불에 발을 덮을 수 있는

작은 공간만이 남아있었다


한 겨울 아이들이 썰매를 타러

얼어붙은 냇가로 나가면

고양이가 부엌을 통하여

살며시 들어와

아랫목에 자리를 잡고

졸린 눈을 깜박이다

어머니의 부지깽이로 내쫓기곤 하였다.


겨울 저녁 어머니는

아랫목에서 엉덩이를 지지며

드라마 달동네를 보는 것으로

하루의 피로를 녹이셨고

사남매는 이불 속에서

전설의 고향을 보며

서로의 담력을 자랑하였다


차도남, 차도녀의

차가운 시크함이

대접받는 도시에서


내복 속을 파고 드는 강추위에

너무나 뜨거워 까맣게 타버린

그 시절 아랫목 속

사람의 체온이 몹시도 그립다




인생은 탁구다


인생은 탁구다.


강 스매싱이 오면

커트로 잘 받아 넘겨야 한다.

계속 강 스매싱이 오면

반격을 해야 한다.

반격이 성공해서 이길 수도 있지만

실패해서 질 수도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탁구다.


때로는 속일 줄도 알아야 한다.

오른쪽으로 치는 척하면서 왼쪽으로 치고

커트로 치는 척하면서 드라이브로 치고

잘 속여야 이길 수 있다.

나의 수가 상대방에게 읽혀

역습을 당하면 허탈해 지지만

그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탁구다.


끝없는 연습으로 고수가 되어

하수들이 몰려 와 한게임을 조르면

흐뭇해지기도 하지만

문득 뒤돌아 보면

나를 갖고 놀 고수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탁구다.




파쇄를 하며


너는 멋진 슈트에

세련된 차를 타고

처음 사무실에 왔었지


베일 듯 각진 모습으로

프린터에 날렵하게 자리 잡고

일정표며 보고서며 성과표로

산출되는 너의 모습은

정말 의젓했다


일 년간 캐비넷과 서고를

부지런히 오고 가며

노란색 파일에 담겨

활약하던 너


인사이동 전 날 분쇄기에 갈려

너의 일 년동안의 노고와 추억이

조각조각 제분될 때

내 마음은 찢어지는 듯 했다


마침내 가루가 된 너는

검은색 비닐수의에 담기어

화장터에서 소각되는 운명


그러나 너무 슬퍼마렴

정기감사기일이 되면 우리는

스캔되어 전자서고에 헌액된

너의 분신을 불러내어

삼겹살과 소주 한 잔으로

너와의 추억을 반추할 테니...




부고


아직 읽지 않은 거니?

미수신자 1이 남은 카톡메시지


어제 받은 너의 부고

42살의 고인은 익숙하지 않구나


언제나 밝은 미소로 주위를 밝혀주던 너

언제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던 너

언제나 자기보다는 모두를 생각하던 너


오는 건 순서가 있어도 가는 건 순서가 없다고

농담처럼 던진 말이 현실이 되었구나


너가 열지 않은 카톡메시지는

편지로 적어 우체통에 넣어둘게

수신자 주소

하늘시 행복구 별동 천사번지

그곳에서 행복하면

답장은 안해도 돼


그래도 다행이야

보고 싶을 때 열어 볼

너의 사진이

카톡에 저장되어 있어서...





면도를 하다가


면도를 하다가

얼굴을 베었다


면도기를 물들인

선홍색 핏물을

흐르는 물에 씻으며


30년을 해도 서투른

나의 면도질을

낡은 면도날의 탓으로 돌린다


면도날을 새 것으로

바꾸며 드는 생각 하나


혹시 내 서투른 말의 날이

다른 사람의 얼굴에

생채기를 내지는 않았는지?


누군가의 영혼에 상처를 주었다면

고의는 아니었다고

서툴러서 그랬다고


나의 영혼이

누군가의 말날에

상처를 받았다면

그것도 고의는 아니었구나

그들도 서툴러서 그랬구나


베어진 감정의 찌꺼기들을

낡은 면도날과 함께

쓰레기통에 버린다




만원의 행복


초과근무수당

1시간에 만원


10시간을 하면 아버지 담뱃값

20시간을 하면 장인어른 간식값

30시간을 하면 딸아이 영어학원비

40시간을 하면 마눌님 겨울코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행복감에

아빠는 오늘도 초과근무 중


식대를 아끼면

사랑하는 후배들과

호프 한잔


쉿! 이것은 우리만의 비밀




자소서


자!


이제 너를 세상에

뱉어 낼 시간


입학, 취직, 승진을 위하여

너를 포장해야 해


토익성적과 적성검사표

자격증으로 너를 증명해야 해


치열하게 살아야 해

공부, 취미, 운동

소소한 경험을

특별하게 표현해야 해


봉사활동도 잊지는 않았겠지


너에게 주어진 공간은

A4 용지 1매

그 안에 너를 뱉어 내야 해


세상으로 받아 들여지기 위해

세상에서 떠밀리지 않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