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걷던 아들
서울에서 우리집은 꽤 높은 언덕에 있었습니다. 차가 없던 우리 가족은 그 언덕을 자주 오르내렸습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 아마 7살쯤일까요? 아마도 더운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날도 장을 본 봉지들을 바리바리 들고 언덕을 힘들게 오르고 있었습니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저희 집은 아무리 걷고 걸어도 계속 멀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아들 놈이 자꾸 뒤로 걷는 것이었요. 위험해보이기도 해서, 아이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그 때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엄마, 앞만 보고 가면 집에 빨리 가야지 하는 생각에 더 힘들어요, 이렇게 뒤로 가면, 다니는 사람들도 보고.. 거리도 보고 재밌어요"
정말?? 아이 이야기가 재밌어서 깔깔거리며, 혹시하는 마음에 나도 뒤로 걸어보았습니다.
그래요!!!
정말 목표에서 눈을 돌리는 순간 정말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랫것들은 모르는 언덕에서 내려볼 때만 가능한 멋진 일상들 말입니다. 우리 동네에 풀이 이렇게 많은지도 몰랐고, 우리 집에 이렇게 푸른 하늘과 가까운줄도 몰랐습니다. 삼삼오오 신나게 돌아다니는 대학생들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똑 같은 길인데, 왜 내려올 때랑 달라보일까요? 내려올 때는 또 목표만 보였나 봅니다.정말 우리는 목적지에 깃발을 꽂아 놓고는 한 눈 파는 것조차 삼가면서 인생의 줄달음질합니다. 그날 우리 아들은 목표에서 눈을 때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뒤로 걸을 때는 근육에도 특별한 일이 일아닙니다. 바로 주인공과 악당이 바뀌는 현상인데요. 이는 우리 건강에 특별한 효과를 준답니다.
이 이야기를 조금 이과적으로 이야기해보면, 아마도 언덕을 오를 때 사용하던 대둔근과 슬괵근을 잠시 쉬게하고, 반대쪽에 짝을 이루고 있는 대퇴사두근과 전경근을 사용했기 때문에 수월함을 느꼈을 겁니다. 마치 오른팔로 무거운 짐을 들다 잠시 왼팔로 드는 것과 같은 간단한 원리입니다.
근육은 당길 수는 있어도 밀수는 없다.
근육은 두 나무 사이에 있는 고무줄처럼 동작합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두 나무막대는 관절이란 부분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요. 또, 그 두 나무 막대에 고무줄이 연결되어 있죠.
이때 어떤 스위치를 작동시키면 고무줄이 수축합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고무줄이 수축하는 방향으로 두 나무 막대의 거리가 축을 중심으로 줄어들겠지요.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근육의 움직임입니다.영어 표현에 pulled muscle이란 말이 있습니다. 근육이 놀라거나, 다쳤을 때 관용적으로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pulled muscle은 있어도, pushed muscle은 없어요. 그림에서 고무줄이 당겨서(pull the lower arm)해서 관절(팔꿈치)을 구부릴 수 있지만, 밀어서(push the lower arm) 펼 수는 없습니다. 관절을 다시 펴려면 근육의 꼭 반대쪽에 있는 근육이 수축해야만 합니다. 좀 이상하지요? 여러분이 상완삼두근이 파열되어 사용하지 못한다면, 상완 이두근을 이용하여 팔을 굽힐 수는 있어도 펼 수는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팔에 힘을 빼서 팔을 편다면, 중력이라는 외부의 힘의 작용입니다. 팔을 편것이 아니라, '중력에 의해 팔이 펴졌다' 해야 맞습니다. 이것이 근육을 움직이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관절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움직임의 방향 양쪽으로 근육이 있어야 합니다.
중장비의 피스톤암은 밀수도 있고, 당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근육은 짝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야, 폈다 구부렸다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요.
주인공과 악당, 주동근과 길항근
이 짝을 이루는 근육 중 내가 수축시키는 근육을 주인공, 의학 용어로 agonist, 반대쪽에 있는 근육을 악당 antagonist라고 합니다. 옛날 그리스 연극에서 영웅 hero를 agonist, agonist를 공격하는 인물을 ant-agonist라고 했답니다. 현대 영어로 하면 hero와 antihero입니다. antagonist에 ant는 anti~ 와 마찬가지로 반대를 뜻하는 접두사입니다.
Agonist (아고니스트)
그리스어 "ἀγωνιστής" (agonistes)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리스 연극에서, 아고니스트는 주요한 캐릭터나 주역을 의미했습니다
운동생리에서, 아고니스트는 주 행동을 하는 근육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팔을 구부리는 동작에서의 아고니스트는 상완이두근입니다.
Antagonist (앤타고니스트)
"ἀντί" (anti)는 "반대"를 의미하므로, "반대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 연극에서, 앤타고니스트는 주역의 목적이나 행동에 반대하는 캐릭터를 의미했습니다.
생리학에서, 앤타고니스트는 아고니스트의 행동과 반대되는 근육을 의미합니다. 아고니스트가 주는 동작에 대항하여 그 동작을 제어하거나 반대로 움직이게 합니다. 예를 들면, 팔을 구부리는 동작에서 팔을 다시 펴게 하는 상완 삼두근이 앤타고니스트입니다.
아래 그림 왼쪽처럼 팔을 굽힐 때는 이두근이 주인공, 삼두근이 악당이되고, 오른쪽 그림 처럼 팔을 펼 때는 삼두근이 주인공, 이두근이 악당이 됩니다.
사족보행을 하는 동물이나, 이족보행을 하는 사람이나 모두 다리의 뒤쪽 부위가 크고 더욱 강력합니다. 걷기나 뛰기에서 중력에 저항해서 몸무게를 앞으로 밀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뒤로 걷게 되면, 이 히어로와 앤티히어로가 반대로 바뀝니다. 앞으로 걸을 때 주역을 담당하던 종아리 뒤쪽(비복근), 엉덩이 근육(둔근)은 일을 덜하고, 평소 일을 덜하던 종아리 앞쪽 근육(전경근), 허벅지 앞쪽근육(대퇴사두근)등이 더 많은 일을 합니다. 배트맨이 악당(안타고니스트)이 되고, 조커가 주인공(아고니스트)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평소 잘 안 쓰던 근육이 일을 하게 하고, 익숙치 않은 운동 속에서 균형감각과 근육의 협응 능력을 더 발달시킬 수 있습니다. 한국교통대 연구팀이 운동장애, 마비를 겪는 뇌졸중 환자를 분석한 결과, 뒤로 걷기 재활훈련을 한 환자는 그렇지 않은 환자에 비해 안정적인 보행을 하고, 보행속도 향상 폭이 컸다고 합니다. (헬스조선, 2023/03/19 최지우기자)
기억력도 향상
근육이 일을 할 때 주역, 악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연도 있어요. 이를 보조근(synergist)라고 합니다. 주로 주인공이 일을 하는데 보조적인 역할을 합니다. 로빈과 배트걸이랄까요? 뒤로 걸을 때는 이 보조근이 평소와 다른 상황 속에서 자극을 받아 열심히 일을 하게 됩니다. 걸을 때 균형을 잡아주는 안정근(Stabilizer)도 있습니다. 수많은 다리의 근육들이 협응하면서 원활한 걸음을 만들어냅니다.
다리 뿐아닙니다. 뒤로 걸을 때는 복근과 척추의 기립근역시 평소와 다르게 새로운 적응을 해나갑니다. 이런 새로운 자극은 놀랍게도 두뇌에도 영향을 준답니다. 런던의 로햄턴대학교(University of Roehampton)의 실험결과 뒤로 걷는 사람이 가만히 서 있거나 앞으로 걷는 사람보다 기억력 테스트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심리과학 학술지(Psychological Science)에 실린 2009년의 한 연구에서는 뒤로 걷는 것이 사고 능력과 인지 조절 능력을 강화함으로써 뇌기능에 도움을 준다고 했습니다. 연구원들은 뒤로 걷는 것이 인지능력을 유발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뒤로 걸었더니 평소 안보이던 것들이 보였을까요?
놀랍지요? 단지 뒤로 걷는 것이 우리를 일상 속의 safe zone에서 끌어내, 새로운 모험에 세계로 안내한 셈입니다. 우리 아들말대로 새로운 것도 보이고, 목표에서 눈도 돌리게 되고, 근육도 발달하고, 머리도 좋아진다니 말입니다.
짝을 이루는 주인공과 악당들
팔꿈치를 굽히는 이두근(biceps)
팔꿈치를 펴는 삼두근(triceps)
손목을 굽히는 손목굴근(wrist flexor)
손목을 피는 손목신근(wrist extensor)
배를 굽히는 복근(rectus abdominis)
허리를 펴는 척추기립근(erector spinae)
고관절을 굽히는 장요근(psoas)
고관절을 피는 둔근(gluteus)
무릎을 굽히는 슬괵근(hamstring)
무릎을 펴는 대퇴사두근(quadriceps)
발목을 굽히는 전경근(tibialis anterior)
발목을 펴는 비복근(gastrocnemius)
서울에 두고온 이대 앞 그 언덕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