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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겸비 Feb 06. 2024

행동과 감정을 억누르는 아이


현장에서 상담을 하다 보면 가끔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시는 양육자분들이 있습니다.


"아이가 순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까다로워요."

"집에서는 잘 하는데 사람들 앞에서는  해요."

"아이가 잘하고 싶어 해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요."

"아이가 밖에서는 모범생인데, 집에서는 엄마한테 자꾸 짜증을 내요."

"아이의 속마음을 모르겠어요. 질문을 해도 입을 꾹 닫고 있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 갑자기 섭섭했다고 말을 하는데 당황스러워요."


이런 아이의 특징은 대부분 아이의 민감함이나 어려움을 가까운 사람만 눈치챈다는 점입니다. 선생님은 '규칙을 잘 따르고 문제가 없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집에만 오면, 양육자에게 짜증을 내거나 매달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특징을 보이는 아이들의 심리는 무엇일까요?





수줍고, 낯가리고, 조용하지만 민감한 아이들



사진 출처: (좌) https://necsi.edu/jerome-kagan  (중) Amazon  (우)예스24


하버드대 심리학과 석좌교수인 제롬 케이건(Jerome Kagan)과 동료들은 생후 4개월 된 아기 450여 명을 대상으로 기질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색깔로 된 모빌을 아기들에게 보여 주거나, 사람 목소리를 들려주거나, 묽은 알코올을 묻힌 면봉을 코끝에 대주는 등 예기치 못한 낯선 자극을 주었어요.


그 결과 전체의 약 20%는 팔다리를 흔들고 주어진 시간의 1/3 이상을 울었으며, 앉아있는 상태에서 등을 뒤로 젖히는 등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약 40%는 자극이 주어져도 별로 울지 않았고, 등을 뒤로 젖히지도 않았으며, 종종 미소를 지었습니다. 케이건은 전자를 '고반응성', 후자를 '저반응성'으로 명명했습니다.


저반응성과 고반응성 그룹의 아이들을 추적 연구한 결과, 고반응성 아이들 가운데 약 20%가 1,2,4,7살에 관찰될 때마다 한결같이 소심하고 낯을 가렸으며 말이 없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반면 저반응성의 아이들 중에서는 이 네 차례의 평가에서 말이 없고 소심한 모습을 보인 아이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케이건은 이러한 기질적 편차에 대해, 자극에 대한 반응과 관련 있는 편도체와 전전두엽피질을 연결하는 흥분성 회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고반응성 아이들은 편도체가 흥분하는 정도가 더 큽니다. 이러한 아이들은 새로운 자극에 수줍고, 조용하고, 위축된 반응(행동 억제; behavioral inhibition)을 보이게 됩니다.





'억제성 기질'의 두 가지 양상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낯선 자극에 대한 반응이 크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아이는 큰 소리로 울고 밀어내지만, 어떤 아이는 얼음이 된 것처럼 가만히 서서 자신의 반응을 숨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나도 잘 감추어서 다른 사람이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요.


STA(Self-Discovery Temperament Assessment) 기질 검사를 개발하고 <육아 고민? 기질 육아가 답이다!>를 쓴 최은정 대표는 '완벽과 인정을 얻기 위해 자신의 반응을 조절하는 기질적 성향' '억제성 기질'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억제성 기질'은 어떤 기질적 요소가 억제되느냐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1. 욕구 억제성: 어떤 상황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려는 욕구는 있지만, 접근하지 않고 회피하며 조절함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낯선 상황에서 긴장하며 주저한다)


욕구 억제성 기질이 있는 아이는 무언가를 해보고, 또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강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걸 해내기까지 겪어야 할 일에 대해 큰 부담감을 가집니다. 특히 사회적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적응하기보다는 긴장감을 많이 느끼는 스타일이기에, 결국 실행해보지 못하고 친구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합니다.


2. 정서 억제성: 정서적으로 민감하지만, 기분이나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숨기거나 회피함 (느끼기는 하나, 그만큼 표현하지 않고 누른다)


정서 억제성 기질이 있는 아이는 감정이나 불편함을 분명 느끼기는 하지만, 이를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이 아이들이 어떤 생각이나 기분인지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이러한 불편함을 표현하지 못하고 쌓아놓고 있다가, 어떤 사건이 방아쇠(trigger)가 되면 뻥 터져서 양육자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 욕구 억제성과 정세 억제성이 둘 다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둘 중 하나가 우세한 경우도 있습니다. 





억누르는 아이 도와주기



'아이들도 사회생활을 한다'는 말이 있어요. 선생님이 계실 때는 밥도 잘 먹고, 말도 잘 듣다가 집에만 오면 찡찡이가 되는 현상을 두고 이런 우스갯소리를 하지요. 특히 '억제성 기질'을 가진 아이는 완벽하게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커요. 또 신중한 편이고 규칙을 어기는 것도 불편해하기에 선생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모범생일 때가 많고 좋지 않은 평가를 듣는 경우는 드뭅니다.


다만 이는 반의식적으로 애써 노력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 아이들도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스트레스를 안정된 장소(집)나 대상(가족)에서 해소하려 합니다. 이때 양육자가 지나치게 허용적이거나 반대로 아이의 기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스트레스 관리를 해주지 못할 경우, 아이가 '꼬마 폭군'으로 돌변하기도 해요.


그렇다면 '억제성' 기질을 가진 아이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1. 욕구 억제성 기질 - 하고 싶으나 주저하는 아이


이 아이들은 '해 보고 싶다!'는 마음과 '근데 했다가 잘못되면 어쩌지?'라는 마음이 공존합니다. 그래서 내적 갈등과 스트레스가 심한 편이에요. 양육자 입장에서는 갈팡질팡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 같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아이들은 스스로도 자신이 느끼는 양가감정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생각과 감정의 언어화'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놀이터에 갔는데 미끄럼틀 앞에서 안절부절못한다면, "미끄럼틀을 보고 싶은데(욕구), 무서울까 봐 걱정되는구나(감정)."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단번에 도전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으니, 관찰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거나(양육자가 먼저 타보기, 친구들이 타는 모습 지켜보기), 단계를 쪼개어 해보기(낮은 미끄럼틀 타기, 양육자와 함께 타기) 등의 방법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욕구 억제성 기질'의 아이들은 은근한 조력이 참 중요한 아이들입니다. 왜냐하면,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랬구나~ 괜찮아~"라고 마음만 읽어주고 끝나면 답답함을 느낍니다. 특히 사회적 상황에서 주도성을 느껴야 하는 만 3세 이상의 아이라면, 무조건 환경을 피하게 해 주기보다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잘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격려하면서 성취감을 맛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2. 정서 억제성 기질 - 느끼는 것에 비해 표현이 적은 아이


정서 억제성 기질을 가진 아이는 표현을 안 하는 것이기도 하고, 못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질상 표현하는 것보다 누르는 것이 더 편하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양육자가 이러한 아이의 기질을 '답답함', '소심함'으로 해석하지 않고, 아이가 편안한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원하는 길이나 자기 전 10분 동안 아이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창구를 마련해 주는 것이지요.


정서 억제성 기질의 아이가 특히 힘들어하는 상황 중 하나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아이와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제가 기질검사를 했던 아이들 중에 한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친구를 세게 밀친 일이 있었습니다. 학폭 이슈로까지 번지지는 않았지만, 그전까지는 너무나 모범적으로 학교 생활도 열심히 하고 아무 조짐이 없었기에 양육자와 선생님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그 아이는 친구가 자꾸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말하는 것이 불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지만 그 친구는 아이가 불편해하는 포인트를 눈치채지 못했고, 결국 참고 참다가 터져서 친구를 밀치는 행동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만 들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겠다'라고 심정적으로 공감은 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이가 친구를 밀치는 행동을 한 것은 결과적으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정서 억제성 기질은 간접적이고 은근하게 전달하거나, 사건이 다 지나고 나서 뒤늦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문장으로 자신의 의사 표현이 가능한 시기부터는 자신의 생각과 기분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 연습은 역시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때 한 가지 팁이 있다면, 인과관계를 양육자가 모르는 상황보다는 관찰해서 다 아는 상황에서 시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동생이랑 놀다가 동생이 자꾸 자신의 장난감을 가지고 가서 아이가 울음이 터진 상황이라고 합시다. 양육자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면 아이의 행동을 오해할 일 없이 자신 있게 개입할 수 있습니다.


"동생이 장난감 자꾸 가지고 가서 속상했구나." 여기서 한 발 더 나가면 아이가 우는 것 대신 했다면 좋을 말과 행동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아이가 아직 말이 트이지 않았다면 장난감을 가지고 동생이 올 수 없는 곳으로 가게 하거나, 아이가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00아, 따라 해 봐. "이건 내 장난감이야.""라고 말하게 하고 동생에게 다른 장난감을 주도록 도와줍니다.


만약 아이가 초등학생 이상의 나이대라면, 더 직접적으로 알려줄 수도 있습니다. "00이 네가 느끼는 감정을 다 말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 하지만 네가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숨기거나 짜증만 내면 사람들이 널 도와줄 수 없어. 그러니까 연습을 해야 해."라고요. 정서 억제성 아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 감정을 마냥 숨기거나 부적절하게 표현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억누르는 기질에서 너그러운 기질로



사실 저도 억제성 기질의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 순하면서도 까다로운 면모로 엄마의 애를 태웠었지요. 또 목회자의 자녀로 태어나 제가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보다는 배려하고 양보할 때 더 칭찬받으며 자랐어요. 그러다가 중학생 때 또래 관계에 어려움을 겪었고, '왜 나는 싫다고 말을 하지 못할까?' 자책하며 더 위축되었던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간을 지나며 제가 사람들의 고유함에 더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한 번 도전해 보는 것, 표현이 좀 서툴러도 일단 내 마음을 전달해 보는 것... 사실 이런 연습을 하게 된 것도 몇 년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제가 가진 기질을 긍정하게 되었고, 그 기질을 실험해 보면서 더 멋진 사람이 되었다고 느낍니다.


STA 기질검사가 리뉴얼되면서 각 기질의 이름이 더 긍정적인 용어로 수정되었습니다. '억제성 기질'도 '관용(寬容) 기질'로 이름이 바뀌었어요. 단순히 자신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점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조절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강조한 단어예요.


여러분이, 또는 여러분의 아이가 억누르는 기질인가요? 그렇다면 축하합니다! 스스로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는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참고문헌


제롬 케이건(2011), 성격의 발견 (내 안에 잠재된 기질·성격·재능에 관한 비밀), 시공사.

최은정(2019), 육아 고민? 기질 육아가 답이다! (당신은 당신의 아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소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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