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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어캣 Sep 15. 2023

사람이 곧 장소다

아그레아블 최후의 날

제목은 네가 글쓰기 모임 저번 기수 마지막 회차에서 제비뽑기 랜덤 주제로 냈던 글감이다. 글감을 제출한 너도 글감을 뽑으신 분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날의 모임 자리는 그 모임의 끝이 다가온다는 사실과 앞으로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각자 가슴속에 담긴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어디까지나 현재의 물리적 장소에서는 말이다.


너와 나는 '아그레아블'이라는 소셜 모임 플랫폼에서 처음 만났고 여러 종류의 모임들을 거치며 연인이 되었다. 너는 2019년부터, 나는 그 이듬해부터 활동을 시작해서 현재 3~4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글쓰기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아그레아블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떨어지는 이야기였다. 무리 없이 운영되고 있는 줄 알았던 플랫폼이 한순간에 끝나고야 만다니. 믿기가 힘들고 믿고 싶지도 않은 말이었다.


"상실감이 장난이 아니야."


그날 저녁 너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나보다 더 오래, 더 자주 각종 모임에 참여했었던 너이기에 더욱더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고속터미널로 가는 길에, 그리고 도착해서도 서로를 위로하느라 바빴다.


"괜찮아. 사람이 곧 장소야. 우리가 서로의 아그레가 되어주자."


너는 나를 품에 안은 채로 이와 비슷한 말들을 끊임없이 했다. 정말로 중요한 건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거기 모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겠지. 비단 아그레아블뿐만 아니라 어디에나 어떤 관계에나 적용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관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살면서 겪어온 장소와 사람의 관계가 실로 그러했다. 대학 시절 열심히 활동했던 과 학회에서도, 졸업 직전 과감하게 뛰어들었던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취업준비를 하면서도 놓지 않았던 소규모 독서모임에서도 똑같았다. 단지 매주 만나던 사람들을 뜸하게 만난다는 차이가 있을뿐이지 공간이 사라진 뒤에도 인간관계는 끊이지 않았다.


다행히 3월 20일 오늘 올라온 공지에 따르자면, 아그레아블은 끝나지 않는다. 문을 닫는 건 역삼에 있는 '아그레라운지'라는 공간일 뿐, 모임 플랫폼 자체는 근처의 어딘가로 위치만 옮겨 계속 이어진다고 한다. 우리가 폐업 소식을 들은 그날의 고속터미널에서 애틋하고 안타깝게 ‘아그레아블 최후의 날’을 바라보았던 일이 무색하도록 만족스러운 결론이다. 그래도 우리가 이번 일을 통해 얻은 교훈, 즉 ‘사람이 곧 장소다’라는 명언은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 장소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쭉 이어진다. 너와 나도 그렇다. 설령 이번이 아니라 나중에 언젠가 진짜로 '아그레아블 최후의 날'이 찾아온다 해도 그 사실은 변치 않는다. 우리는 모임에 참여하든 그렇지 않든 함께 잘 지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2023.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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