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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 미 Jul 04. 2019

오지랖, 고백할 이유가 있어?

아직 늦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껏 나와의 관계 속에 있는 모두에게 나는 먼저 다가간 사람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입학 날, 반이 배정되고 한 교실에 50여 명의 학생이 모였다. 담임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헤어졌다. 몇몇 친구들은 교실에 남아 있었고 같은 중학교에서 올라온 몇몇 녀석들은 입학 당일, 두 번 다시없을 단축 수업 날이니 놀거리를 찾아 나섰다. 모두가 나간 교실 안에 모여 있던 몇몇 친구들을 뒤로하고 미닫이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던 나는, 다시 교실 문을 열고 말했다.


“ 나, 내일…… 반장 선거 나갈 건데 뽑아줘.”


반장은 나에게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아니, 이루지 못한 것들 중 하나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중학교 때도 나는 매년 반장선거에 나갔다. 하지만 늘 부반장이었다. 반장에서 학급회장으로 불리던 다른 해에도 나는 부회장이었다. 난 왜 반장이 될 수 없을까, 되지 않을까 같은 고민보다는 반장이 되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더 컸던 승부욕 강한 십 대였다. 고등학교 입학 첫날, 생판 모르는 녀석이 집에 가려는 무리들에게 반장 선거 나갈 거니까 뽑아달라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낯이 두꺼웠구나 싶다. 여하튼 나는 처음으로 반장이 되었다.

당시 나는 꽤 카리스마가 있으면서도 잘 노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신임이 두터운 반장이었다. 화장실 앞이 교실이었던 우리는 다른 모두의 예상을 깨고 성적은 꼴찌, 체육대회는 일등인 흥이 넘치는 반이었다. 그 역할에는 담임선생님도 한몫을 했다.

담임은 나를 ‘엄석대’라고 놀렸다. 당시 나는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지 못한 학생이었으니 ‘엄석대’가 누군지 몰랐다. 그냥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언가 떡대가 크고 넓으며 괄괄하고 큰 소리로 앞장서는 허울뿐인 듯한 이름이었다. 시간이 지나 소설에서 그는 이름과 같은 인물이었다. 담임이 악의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나의 촉은 틀림없었다. 유쾌하지 않았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문열의 소설. 1950년대 정치, 권력 등의 주제를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교실을 배경으로 다루고 있는 장편소설. 1987년 이상 문학상 수상, 1992년 영화 제작된 소설로 대도시에서 시골로 전학 온 병태가 독재자처럼 군림하고 있는 석대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폭로하려 했으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는 석대에게 결국 굴복당하고 만다. 이후 6학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석대의 부정 행각이 드러나고 석대는 사라진다.


반 아이들이 자기주장인 강한 나를 좋게 봐주고 대부분의 일들이 나의 주도하에 일어나는 것에 대한 선생님의 조롱 섞인 장난 정도의 수준이었다. 좋게 포장하자면 그럴 테지만 나는 소설의 인물처럼 부정부패를 저지른 적도 없고 대리시험이나 폭력 등을 통해 학생들 위의 또 다른 학생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나는 1년의 반장 생활을 하면서 딱히 주어지는 특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즐거웠다. 반장이란 이유로 반 구성원 누구와도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때로는 반장이라는 이유로 반 구성원 누군가들의 싸움에도 끼어들 수 있었다. 보통 말리거나 중재하는 일이었다.  우리 반은 모두 다 같이 잘 지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실로 그게 가능한 말인가 말이다. 구성원은 약 57명이나 되었고 아무리 십 대여도 각기 다른 삶을 살았고, 게다가 신도시여서 이 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보단 아파트 분양 등과 같은 이유로 이사 오게 되었으며 당시에는 비평준화 지역이어서 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연합고사가 있던 때라, 다니던 중학교의 한 반에서 15등 정도 안에 드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상태인데 말이다. 십여 년 전의 일이니 이 정도로 기억하지만 사실은 누군가에겐 미움을 받고 나의 시선으로만, 서투른지도 모른 채 허우대 좋게 앞에 서 있는 꼴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주목’, ‘관심’

    좋아하는 친구에겐 손편지를 쓰고 생일을 챙겨주면서 집에 놀러 가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선 모두의 앞에 서야 하는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러한 것들보다 손쉽게 자신의 이름이나 모습이 아닌 많은 것들로 사람들의 관심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 한 장의 사진 혹은 맛집 아니면 다양한 콘텐츠로 사람들의 관심 앞에 설 수 있고 때로는 내가 아닌, 익명으로도 가능하다.  

관심을 갈망하는 방법이 예전과는 달라 ‘관심종자’라는 말로 빈죽대지만 사실 우리는 누구나 ‘관심’ 속에 태어났고 점점 줄어드는 관심을 자연스레 다른 것들로부터 채워오고 있다. 초 중고 시절 난 관심받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수도 없이 사람들 앞에 나섰다. 잘할 수 있는 거라면 당연히 나섰고 잘할 수 없는 일이라면 노력했다. 이유 없는 사랑과 관심은 부모로부터 받는 것이 끝이라고 여겼다. 그마저도 깨닫기엔 오래 걸리지만.

    손이 덜덜 떨리고 온통 주변이 내 심장소리로 둘러싸이고 손발이 급격히 차가워지면서 식은땀이 날 정도로 떨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 순간이 지나 끝이 났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까지의 짜릿함이 좋았던 모양이다. 밑도 끝도 없이 사람들 앞에 나섰던 걸 보면.  단순히 불특정 다수 앞에 서는 일 외에도 심장이 떨리지만 매번 앞다퉈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거나 낯선 이에게 가까워지길 바라며 다가서기도 했다.

어차피 서로를 모르는 단계 아닌가. 첫 만남이니. 두렵지만 설레고 신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가까워졌던 모든 순간들이 아련하지만 아름다웠던 적도 있고 끝내 그 끝이 좋지 않았던 적도 더러 있다. 남들 앞에 나선다는 것,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일에 설레고, 삶의 기쁨이 전부 그곳에서 생기는 것처럼 사는 나에게 ‘오지랖’이라는 단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지랖 넓은 사람’이라는 말 외에 최근에 사람들로부터 그 단어가 부정적인 동사들과 붙어 지낸다는 사실을 새삼 이제야 알았다. 누군가에게 ‘오지랖 부린다’, ‘오지랖 떤다’, 와 같은 말을 해 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단어는 낯설었다.

직접 쓰지 않아 낯설지만 종종 이 말을 다른 누군가를 향해 쓰는 상황들에 놓였던 적이 있다. 쉬운 예로 결혼, 출산과 같은 질문에서다. 미혼이던 시절, 그와 나는 오랜 시간 연애를 하고 있었기에 주변으로부터 ‘언제 결혼할 거야?’와 같은 질문을 많이 받았다. 사실 나에게 그 질문은 한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그는 거의 매일 한 번씩은 그 질문을 들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나는 그에게 “저희가 알아서 할 겁니다.”라고 관심을 꺼두길 원하는 대답을 해주라고 했다. 누군가 나에게 당시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물었을 때 “결혼이란 걸 꼭 해야 하나요?”라고 짓궂게 되묻기도 했다. 결혼 자체에 대한 부정보다는 ‘당신이 나의 결혼에 대해 어떤 관심이 있는지 모르지만 결혼을 꼭 해야 한다는 전제를 두고 말하시네요.’와 같은 뾰로통한 속마음이다.


    관심은 선택을 기반하고 있다.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내가 그 사람에게 호감이 있는지에 대한 것과 연결되어 있고 그 관심을 표현하는 방법은 오로지 표현하는 사람의 선택에 달려 있다. 직접적으로 무턱대고 물어보고선 관심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관심의 표현을 그 정도로 밖에 할 수 없는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엔 관심을 표현하는 자와 관심을 받는 자의 관계의 척도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오지랖은 시시콜콜 남의 일에 참견, 간섭을 하는 일로 사회적으로 규정되어 있어 결국 '오지랖 부린다', '오지랖 떤다'와 같이 관계의 선을 넘나드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제 와서 내가 오지랖이 넓은 사람, 오지라퍼임을 인정하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내 오지랖은 경계가 있다고 설명하기엔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다. 이미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 말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선의, 이타심, 이기심, 관심, 애정, 도움, 개인주의 등과 같은 다양성을 가진 말이라고 하기엔 터무니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그동안 나는 좋아 보이는 저 단어들이 담뿍 담긴 오지랖을 부려오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결국 당하거나 받았거나 하는 식의 기준은 상대의 몫이었을 테지만.







                          


    


    누군가에게 늘 먼저 다가서려 했던 나는 늘 외로움에 허덕거리며 내가 아닌 남으로부터 나를 찾으려 했다. 홀로 유럽여행을 떠났을 때, 40여 일간의 일정 속에서 말을 섞을 누구도, 짧은 영어로 길게 대화할 누구도 없이, 현실감 없는 기가 막힌 풍경을 혼자 보고, 꼭 한 번 먹어봐야 한다는 지역음식을 찾아 먹고, 다시 볼 수도 없을 만큼 곳곳을 사진에 담으면서 나란 사람이 가진 방어력이 꽤 높다는 사실을 알았다. 누구보다 상처 받기 싫고 누구보다 뒤처짐을 못 견디며, 이길 수 없으면 버렸다. 그건 주목, 관심에서 벗어나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또 다른 나를 챙김 없이 버려온 지난 시간들 덕분이다.  빛을 받고 있던 나만을 쫓아다니던 내가 오지랖을 고백하면서 그래도 못나게 살지만은 않았다고 위로하고자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


오지랖에 대한 댓글을 주시면 사건사고 안에서 벌어졌던 저를 좀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 아직도 모자란 생각 한가운데 꽂혀 있는 좁은 시야에서 넓게 더 먼 곳을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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