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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 미 Jul 11. 2019

멘토가 행운이라면

너에게 행운을 주고 싶었어.




    ‘스승과 제자’는 오랜 시간 예술의 소재로 다뤄져 왔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굿 월 헌팅’, ‘완득이’ 등과 같이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교사와 학생으로 만나 서로의 삶의 궤도를 함께 만들어 가는 이야기들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다. 사랑과 같이 이 소재 역시 영원히 이야기꾼들에게 회자될 수밖에 없다. 불멸을 약속하고 세상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하는 이야기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방향을 함께 고민해주고 전폭적인 지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 그 ‘어떤 존재’를 우리는 늘 갈망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학교라는 공적인 공간이 아니더라도, 삶에서 우리가 허우적거리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이라고 느낄 때, 기적과도 같은 존재인 그 ‘어떤 존재’를 살짝 기대하기도 한다.  종교에서 신 일 수 있고, 무속신앙에서 귀인이라 일컫는. 나를 위한 존재. 나보다 앞선 존재 혹은 멘토가 될 수도 있고 선생님, 선배 일수도 있는 사람을 말이다. 






    오래전부터 ‘좋은 어른’에 대해 고민하던 나는 마땅히 어디부터 생각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지난 시간 동안 만난 어른을 생각해봤다. 초등학교 때 재활용품으로 패션쇼를 열고 한 장 한 장 손편지를 직접 써주던 담임 선생님,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책을 선물해 준 고등학교 윤리 선생님, 누구보다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선생님까지 죄다 학교 선생님이었다. 우리가 점점 성인으로 가는 길에는 부모, 선생님, 혹은 그 외에 일가친척 대부분이 일종의 ‘어른’이었고 그들을 벗어나 성인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은 대학, 혹은 직장이다. 아마도 스승과 제자의 소재가 주로 학교에서 많이 나타나는 이유가 성년이 되기 전에 가장 많은 어른을 접하게 되는 공간이기 때문일 테다. 천재도 아니고 마음의 상처가 그리 깊지도 않은 나에게 영화나 소설처럼 헌신적인 가르침과 세상 모두의 응원을 한 데 모아주는 스승은 없었다. 현실적으로 만나기 너무 힘든 존재이고 나 역시 주인공이 되기엔 너무 평범해서 귀인 혹은 스승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더더욱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나에게 없었던 멘토를 누군가에게는 되어주고 싶었다.


    삼십 대가 되고 우연히 알게 된 동생 녀석이 있었다. 나는 재능보다는 재주만 많은 부랑자 신세지만 녀석은 재능이 있어 보였다. 사물을 보는 시각도 남달랐던 녀석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 역시 다른 세계로 가는 듯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은 시간보다 더 빠르게 나를 헤짚어놓을 때였다.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어 가르침을 줄 수도 없거니와 화려한 인맥이 있어 녀석을 소개를 누군가에게 시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 감성이, 시간이 지나 바래지거나 시간보다 더 빠르게 다가오는 현실의 문제들로 갈가리 찢기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양한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고 ‘누군가가 그리 해줬다면 참 좋았겠다’는 마음으로 다가갔다. 여러 전시에 동행하고 밥이든, 술이든 사줘가며 그의 재능을 응원했다.  


    드라마 작가 연수원을 다니던 한 두해 정도에는 드라마에만 집중해야 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드라마를 쓰는 데 있어 분명히 취약한 부분이 있음을 깨닫고 그 부분에 대해 조언이나 도움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알게 된 같은 반 녀석 둘과 함께 밤낮으로 만나며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며 한 자리에서 드라마 단막 한 편을 써내려 가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이런다고 해서 나는 그들에게 귀인도, 멘토도, 좋은 어른도 아니었다. 그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그들을 통해 만족하는 정도에 그쳤다. 나에게 그 ‘어떤 존재’가 없으며 나 역시 그 존재가 될 수 없는 이유는 결국 나 자신에게 있었다.


    불특정 다수가 아니고 애정 하는 누군가에게 보이는 정성이었기에 오지랖으로 둔갑되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이 오지랖이라는 것을. 결코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노력, 시간, 돈이 들었던 상황이었고 어느 부분에선 내가, 다른 어떤 부분에선 그들이 만족했다. 그저 나는 내게 멘토라는 행운이 없었기 때문에도 ‘누구라도’ 멘토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위로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위로보다 더 강력하고 오래도록 동력이 되는 ‘응원’을 보내고 싶었다고 이제야 말한다. 어떤 형태로 둔갑이 되든 어떤 형태로 합리화를 하든 간에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함께 걸어 줄, 흔들리지 않으며 때로는 단단한 마음이 질투심으로 돌변해 나를 할퀴더라도,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을 필요로 했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길은 너무 험난하고 가능성 없게만 보였다.









    관심, 사랑, 온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누군가 다가와 그것들을 준다 해도 선뜻 받아지지 않고, 진심이라는 말을 쉽게 믿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진심을 단순히 믿어보는 것이 왜 상처가 되는지, 나란 사람을 온전히 알 수가 없어서 타자의 시선에 잠깐 기대어 보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랬다. 오래전부터 그냥 멘토가 필요했다. 어느 날 내가 헤매고 있을 때 반 걸음만 조금 더 나갈 수 있게 잡아주는 손길이 필요했다. 누구보다 부족함을 알고 있는 나에게,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입김을 불어 주길 바랐다. 거대한 무엇이 아니어도 상관없으니 다정한 구원을 원했다. 

스스로가 소망하던 무언가는 결국 내가 아니라 남을 통하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다정한 구원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내가 좀 더 다정하면 되는 사람, 내가 좀 더 온기를 주면 되는 사람, 내가 진심이라고 말하면 되는 사람을 만나고 응원했다. 사실은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관리자였지만 실적에도 온갖 신경을 써야 하는 때에 나는 아르바이트하는 친구들을 종종 괴롭혀 왔다. 많은 양의 정리해야 할 일을 주면서도 일이 끝나면 어김없이 밥상이나 술잔 앞에 모이게 했다. 일이었지만 가혹했던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한두 해를 그렇게 지내고 나는 퇴사하고 그들도 일터를 떠났다. 시간이 흘러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보란 듯이 나를 험담했다. ‘일을 무식하게 준다.’ ‘지적질을 너무 많이 한다.’ 등과 같은 이야기였지만 우리는 모두 웃고 있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함께 무언가를 해냈던 시절, 어설퍼 보이지 않기 위해 서로가 애쓰며 빈 공간을 채우던 때 말이다. 그들 중에 글을 쓰기를 원했던 녀석은 어느 날 갑자기 호주로 떠났다가 돌아와서는 한식 조리사가 되겠다고 했다가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가, 여느 날은 편의점 점장이 되어 있었다. 녀석도 어느덧 현실이 스스로를 갈가리 찢어 놓은 것일까. 한 때 녀석은 나를 롤모델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한 번만 더 그렇게 말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노라 엄포부터 놓았다. 하지만 그 말은 묘하게 힘이 있었다. 드라마 소재를 찾거나 이야기를 구성하거나 할 때마다 직장에서 만나던 그 녀석과 밖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무언가 내가 더 많은 것을 이뤄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종종 힘에 부치는 날엔 그 녀석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쩐지 날 보고 있는 녀석에게 기댈 수는 없었다. 나는 더 나아져야 했다. 


    나의 모든 시간은 방황이라는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고 있다. 제주도에서 일을 하며 살 수 있었던 건 서울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뭐든 일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제주에 가기 위해선 서울 직장에서부터 인정받아야 했다. 하루는 회사의 사업 내용이 간략하게 정리된 인포그래픽을 넣은 문서를 만들어야 했다. 포토샵을 어깨너머로 배워본 것이 전부여서 그나마 할 줄 아는 파워포인트로 만들었다. 야근까지 해 가며 밤새 하는 동안 실장님은 퇴근하지 않았다. 압박처럼 느껴졌지만 그도 일거리가 많은 사람이라 그저 야근인 줄만 알았다. 어슴푸레 해가 뜨기 직전까지 문서를 만들던 나를 집 근처에 내려주실 때 알았다. 그녀는 일이 없었다. 그저 이 모든 게 처음이지만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붙잡고 있는 나를 재촉 없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지켜준 것이었다. 그녀가 그냥 퇴근했었다면 그 문서를 완성했을까. 가는 길에 나는 말했다. 고맙다는 말 대신, 지금까지 만든 것보다 내일 오전에 가로형에서 세로형으로 바꿔 빠르게 정리할 수 있을 거 같다고. 그녀는 그저 알았다고 대답해줄 뿐이었다. 꼭 제주로 가서 그녀와 일하고 싶었다. 

제주에서 가끔 회식을 할 때면 그녀는 종종 그런 말을 했었다. ‘나라고 다 알지 못해.’라는 말. 처음엔 그 말이 실망스러웠다. 내가 아는 그녀는 다 알아야 했다. 내가 하나하나 모든 걸 결재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나 “나라고 다 알지 못해. 가끔 집에서 엄마가 차려주는 술상에 술 한 잔 하면서 엄마한테도 물어보는데. 엄마가 말하더라. 모른다고. 나는 칠십이 넘도록 엄마가 모르면 나는 어떻게 알아야 하냐고. 엄마는 그런 거래. 원래 그런 거래 라더라.” 그녀가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우리 모두 다 알 수 없고 세월을 먹어도 모를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실망할 일도, 서운할 일도 아니라는 걸. 


“엄마의 그 말은 때론 위로가 돼. 엄마도 모르는데, 나라고 무슨 수로 다 알겠어.”







    나는 그때의 그 녀석들에게 멘토였을까. 선배였을까. 무엇이었을까. 다정함, 위로, 응원, 온기, 관심, 사랑 이런 걸 주는 사람이었을까. 그저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이었을까. ‘진심’이라는 단어로 점철된 오지랖  혹은 ‘나는 할 수 없었으니 너라도’라는 간곡한 부탁이었을까. 

이제라도 내가 나에게 좋은 멘토가 되어 주고 싶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진심은 진심이라고. 우리 모두 행운아라고. 그렇게 우리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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