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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미 Apr 23. 2022

적당한 것.

적당함과 충만함

루틴이 있는 일상을 좋아한다. 일상의 힘을 믿는 사람이고 일상에 루틴이라는 게 있다면 매일의 일상이 조금은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나만의 루틴 만들기를 좋아하고 루틴이 일상 속에 스며들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 일상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아주 소소해서 지나쳤을 일들이 일상 속으로 들어오면 오늘을 빛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지난 2년간 나의 오전 루틴은 운동이었다. 아이들 등원을 마치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줄넘기를 들고 옥상으로 간다. 가볍게 뛰기 시작해 숨이 살짝 차오를 정도로 뛴다. 땀이 송골송골 맺히면 바람이 그 틈에 들어와 땀을 식힌다. 이 기분 좋은 반복이 자주 나를 옥상으로 인도했다. 줄넘기를 끝내고 내려오면 집을 돌본다. 나로 살아가는 것, 엄마로 살아가는 것, 아내로 살아가는 것이 근본적으로 나뉘어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이고, 때론 엄마이고, 때론 아내이기에 그 모든 순간이 나를 살게 하고 나를 행복하게 한다. 남은 시간엔 근력운동을 한다. 근력 운동은 줄넘기와는 또 다른 희열을 준다. 조금 더 내 몸에 집중하게 한다. 어디 근육을 써야 할지 생각하고 생각대로 내 몸을 쓰는 시간. 온전히 내 몸의 주인이 되어 나를 세심하게 돌본다. 돌이켜보면 나의 오전 루틴은 ‘돌봄’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를 돌보고 집을 돌보는 일. 이 돌보는 행위가 나를 충만하게 만든다. 충만함은 반복을 불러오고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레 루틴이 된다. 꼭 해내고 말 거야 하는 대단한 다짐이 아닌 충만함이 기저에서 발동하다 보면 자연스레 루틴이 된다.


루틴이 일상을 빛내는 역할을 하는 건 ‘충만함’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킬 때이다. 충만함은 객관적인 기준의 충만함이 아니라 나 스스로 이만하면 잘했지! 하며 웃어넘길 수 있는 충만함이다.


어쩌면 충만하다는 건 적당한 것이다. 적당한 건 정도에 알맞은 것. 충만하다는 감정은 내 마음에 알맞게 들어차 있는 것이다. 만족도 행복도 고됨도. 딱 알맞게. 루틴도 충만하고 적당해야 한다. 적당한 선을 넘어서면 일상을 빛내기는커녕 일상을 좀먹기 시작한다. 삶의 우선순위에서 루틴이 일상을 넘어서는 시점. 그때가 위험하다. 아마 그쯤이었다. 운동이라는 루틴이 일상을 넘어서려고 할 때가.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 어때? 더 날씬해진 것 같아?”

아마도 살이 빠진 내 모습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한눈에도 몸이 조금은 정돈된 느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확인받고 싶었나 보다.


“응, 엄마. 딱 적당해.”

응? 적당하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었다. 평소에도 “엄마 예뻐”를 입에 달고 사는 아이라 이 정도의 답을 기대한 게 아니었다. “적당해? 말이 재밌다”하며 웃었더니 


“엄마, 적당한 게 사실은 제일 힘든 거야. 부족하지도 않고 너무 넘치지도 않을 때 딱 적당하다고 하잖아. 엄마 지금 딱 적당해!”.


웃으며 물어봤건만 너무 진지하게 대답하는 아이를 보니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당시 나는 적당함을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적당함과 충만함으로 일상을 채우던 루틴이 어느새 적당함을 넘어서려고 하고 있었다. 삶을 빛내는 루틴이 삶을 좀 먹으려 하고 나를 빛나게 하던 루틴이 나를 어둠으로 끌고 가려고 하던 찰나였다. 나를 그저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인데 나 스스로 나를 평가하려 하고 있었다.


적당하다는 건 적절한 것이고 무던한 것이고 걸맞은 것이고 알맞은 것이다. 내 몸은 내 나이에 적절한 몸이었고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기에 무던했고 내 욕망에 걸맞았고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기에 알맞은 몸이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딱 적당한데.


적당하게 살기로 했다. 충만하게 살기로 했다.


간혹 “적당히 하자, 적당히. 뭐든지 적당히 좀!”이라는 말로 사람의 욕망을 덮어버리는 말을 내뱉는 사람을 주변에서 본다. 그건 적당한 게 아니다. 폭력이다. 적당히는 충만하다는 것. 본인이 충만해야 쓸 수 있는 말이며 적당히라는 말을 내뱉는 사람은 듣는 사람에 대한 충만한 애정과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할 수 있는 말이다. ‘적당히’라는 말은 적어도 적당한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는 엄마에게 아이가 “엄마, 적당해(그래서 예뻐, 충분해, 사랑해)”와 같은 마음으로 말을 건네는 마음, 그 마음이어야 할 수 있는 말이지 않을까.


#사진은 적당함을 몰랐던 나의 너덜너덜해진 줄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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