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형 연애기1화

8살, 전쟁 같은 사랑(2부)

by 김은형

교실 가득 확산되고 진해지는 공포와 달리 나는 다행히도 구구단 책받침을 사 왔기 때문에 쫄 이유가 없었어.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손바닥을 맞으며 아파하는 모습에 온몸이 쫄깃쫄깃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나? 겁을 먹었던 것은 아니야! 여전히 석희의 행동과 석희라는 아이 자체에 대한 강렬한 저항감이 더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지. 그런데 석희가 내 책상 앞으로 오더니 나보고 일어서라는 거야.

왜? 도대체 왜?

나는 구구단 책받침도 있는데 말이지. 정말 어이없잖아?




“ 야! 넌 책받침 사 왔냐고 물어봤는데 대답 안 했지? 그러니까 맞아야 해! 손바닥 내놔!”

“.............. ” ( 선생님은 자전거 페달을 더 빨리 밟고 있을 거야.)

“ 손바닥 내놓으라고! 안 들려? 책받침도 마음에 안 들어. 내놔 ”

“.............. ” (선생님은 자전거 페달을 더 빨리 밟고 있을 거야.)

“ 손이나 내놓으라면 내놔. 어쨌든 넌 맞아야 해! 니들 엄마한테 일렀지?”

“.............. ” (선생님은 자전거 페달을 더 빨리 밟고 있을 거야.)

“ 내가 네 책받침 부러뜨렸다고 일러서 어젯밤 우리 엄마한테 혼났다고 ”

“.............. ” (선생님은 자전거 페달을 더 빨리 밟고 있을 거야.)

“ 너 손바닥 안 내놔? 내가 책받침 확 부 질러 버린다? ”

“.............. ” (선생님은 더 빨리 걷고 있을 거야.)

“ 너 죽을래? 에이~~ 이걸 콱?”

“.............. ” (선생님은 뛰어 오고 있어.)

“ 진짜로 죽을래?”

“.............. ” (선생님은 뛰어 오고 있어.)

“ 야! 진짜 엄청 짜증 나네? 너 내가 반장인 거 알아 몰라? 내 말 안 들리냐고?”

“.............. ” (선생님은 교실 문을 열거야.)

“ 너 진짜 내 말 안 듣지?”

“.............. ” (선생님은 교실 문을 열고 소리칠 거야)

“ 손바닥 진짜 안 내놔?”

“.............. ” (선생님은 자전거 페달을 더 빨리 밟고 뛰어와 문을 열고 소리칠 거야!)

“ 너 죽을래?”

“...... 맞을게 ” (선생님은 오늘 오지 않을 거야.)

“.... 맞겠다고? ”




내가 맞겠다고 말했을 때, 순간 잠시 말을 멈춘 아이의 두 눈에 다시 번쩍 찌르르 섬광이 일었어. 하지만 그 눈빛의 불길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심지어 무서웠지. 석희는 선생님이 전임한 전권으로 슈퍼 파월 스트롱 맨이 되어 있었어. 사실 선생님이 자전거 페달을 더 빨리 밟고 뛰어와 교실 문을 열고 소리쳤다고 해도 석희는 멈추지 않았을 거야! 선생님은 오히려 자신의 일을 대신해주는 석희를 자랑스럽고 대견하게 여기셨지.


석희는 어쩌면 자신과 선생님을 동일시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마치 남자 친구의 사랑을 듬뿍 받는 여자들의 심리상태라고나 할까? 남자 친구 뇌 속에 침입한 연가시처럼 행동하는 여자애들 많이 봤지? 자신과 타자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랑을 담보로 마치 남자 친구가 자신과 일심동체인 듯 맘대로 휘둘러대는? 뭐 그럴 때면 남자들도 중독적 행동을 하긴 해. 똥오줌 못 가리는 거지. 내가 나인지 너인지도 구분 못하고 그녀에게 중독되어 자아를 상실해버리는 거야! 우린 그 상태를 전문용어로 ‘사랑에 빠진 상태’라고 말하지. 중독된 줄도 모르고 말이야!


그런 경우엔 이별도 금방 찾아와. 아프기도 무지 아프지. 왜? 병이잖아!

‘사랑도 병인 양 하여.... ’ 그런데 그게 정말 아픈 걸까? 미친 걸까? 어쨌든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모두 그렇게 사랑에 미치고 싶어 한다는 거야! 이게 명백한 연애소설이라고 우겨대는 이유도 알만하지? 그런데 어쩌면 나는 이미 8살에 그 꿈을 실현했던 것인지도 몰라! 눈치챘지? 아마도 석희는 날 사랑했던 것 같아! 그것도 전쟁처럼 치열한 사랑 말이야! 그의 눈에 일었던 섬광이 내게 말했던 것 같아. 이제 생각해보니... 난 너무 섹시했던 걸까? 벌써 그 나이부터? 하하하하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 매일매일 나머지 공부를 하던 나는 마지막 쪽지 시험도 통과하지 못했고 매일 엎드려뻗쳐 상태로 선생님에게 엉덩이를 맞곤 했어. 그런데 얼마나 처참했는지 알아? 소고기와 김과 조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을 정도로 편식을 많이 했던 나는 영양실조에 의한 종기를 양쪽 엉덩이에 달고 살았어.

어린 왕자가 매일 청소하던 활화산처럼 새빨간 종기가 뾰족하고 샛노란 분화구를 드러내고 있었지. 선생님한테 대추나무 몽둥이로 엉덩이를 다섯 대 쯤 맞고 나면 피고름이 터져서 팬티가 엉덩이에 짝 달라붙어 말라서 집에 가면 벗을 수도 없었어, 그럴 때마다 엄마는 고무 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 나를 앉히고는 엉덩이에 들러붙은 팬티가 떨어질 때까지 천천히 목욕을 시키셨어.


흥! 생각해보니 지금도 좀 서럽다. 얼마나 많이 아팠었는지 말이야. 하지만 억울하진 않았어. 왜? 내 뇌는 정결하고 순수했잖아! 아직 ‘비평’이나 ‘왜?’ 따위의 사고 같은 불순한 물질이 없었던 때였으니까. ‘왜?’라는 질문이 단 한번 머릿속을 강타한 적이 있긴 했어.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아버지가 말씀하셨지.


“ 모든 액체는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낮은 곳의 물이 위로 흐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야!”

“ 어? 그럼 왜 피는 밑에서 위로도 흘러요? 피도 물처럼 액체잖아요.”


그 질문으로 나는 아마도 아버지표 노벨상을 받았던 것 같아. 대견스러움과 기쁨이 복합된 함박웃음을 웃으시던 아버지는 당장 나를 데리고 장난감 가게에 가셨고, 그토록 원하던 인형을 사주시지 뭐야? 참 황홀한 순간이었어. 그래서 생각했지.

“ 아! 질문은 정말 참 좋은 것이구나! ”


나의 ‘왜’는 바로 그때 딱 한번 작동하고, 14살에 오작동해서 물리 수업 시간에 질문했다가 기절할 때까지 선생님에게 뺨을 맞았지. 깨어나니까 양호실이더라. 하하하하. 질문 내용은 ‘왜 저수지에 물은 어떤 부분은 꽝꽝 얼고, 어떤 부분은 꽝꽝 얼지 않는 것인가?’ 였어. 질문이 너무 어려웠던 거지. 만약 선생님이 고인이 되시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어. 진심이야! 암튼 모든 일이 한 가지 결과만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삶의 양면적 성질을 몰랐던 시절 내겐 아주 멋진 깨달음과 배움의 기회였던 것 같아.


어쨌든 난 그렇게 피고름이 범벅된 팬티를 입은 채로 매일매일 접시 치마 원피스를 입고 수피즘 승려처럼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다녔어. 왜? 그즈음 유행이었던 접시 치마 원피스 자랑 질 중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거든. 친구들과 나는 창피한지도 모르고 팬티가 다 보이도록 매일매일 접시 치마를 입고 교실에서 뱅글뱅글 돌 곤했어. 운동장으로 나가도 수피즘 승려들의 집단 명상 댄스를 보는 것처럼 접시 치마 원피스를 입고 운동장을 끊임없이 뱅뱅 도는 여자아이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어. 구도를 위해서가 아니야! 그냥 치마가 더 반듯하고 활짝 펼쳐져야 했기에 돌고 또 돌았던 거야. 그것을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자는 상식 수준에서 벗어난 튀는 인간이었던 거지. 좀 한다는 여자 친구들 속에 속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매일매일 접시 치마 원피스를 입고 돌아야 했어. 그래서 내 엉덩이에 종기와 피 얼룩을 모르는 아이는 없었지. 내 엉덩이의 피고름이 얼룩진 팬티는 얼마나 그로테스크했을까? 하하하 끔찍했을까? 추했을까?


그런 나를 옆으로 째려보듯? 미소 짓듯? 바라보는 석희의 눈빛 속에는 끔찍함도 추함도 없었어. 알 할라지의

<이브라힘 할아버지와 코란에 핀 꽃> 97쪽에 보면 이런 글귀가 나오지.


“나는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고, 내가 사랑하는 존재는 내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의 육신에 녹아든 두 정신이다.”


그런데 석희의 눈빛 97쪽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어.


“ 나는 너를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고. 네가 사랑하는 존재는 내가 되었다. 우리는 두 개의 육신에 녹아든 하나의 정신이다.”


넌 너무 매력적이야! 난 널 욕망해! 널 갖지 못한다면, 난 차라리 널 파괴하겠어! 그 눈빛의 단호함과 강렬함이란... 아직도 절대 잊히지 않아! 어떻게 9살의 남자아이가 그런 정념의 에너지 파를 뿜어낼 수 있었는지.... 내가 오버하고 있는 거야? 흠~~~ 소설이잖아? 그리고 우리의 뇌는 항상 자신이 바라는 데로 지나간 기억을 조작해낸다는 것도 알지? 암튼 위기의 순간은 마치 영원처럼 길고 길게 느리고 느리게 흐르고 있었어.




“...... 맞을게 ” (선생님은 오늘 오지 않을 거야.)

“.... 맞는다고? ”


내가 맞겠다고 말했을 때, 순간 잠시 말을 멈춘 석희의 두 눈에 번쩍 찌르르 또 섬광이 일었어. 나는 그 눈빛의 불길을 이해할 수 없었고 무서워서 눈길을 피했지. 구토가 날 것 같았어. 너무도 강렬해서 직면할 수 없었어. 그러나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던 거야. 갑자기 석희는 내 책받침을 비롯한 책상 위의 모든 사물을 파괴하기 시작했어. 필통, 연필, 책받침, 노트할 것 없이 부러뜨리고 찢고 던지며 전쟁 같은 사랑을 표현했던 거야.


“....... ”( 선생님은 오지 않을 거야. 선생님은 오늘 오지 않을 거야. 선생님은 오늘 학교에 오지 않을 거야.)


결국 나는 석희에게 맞지 않았어.

하지만 맞는 것보다 더 무섭고 두려웠지. 나는 무기력이 그토록 무서운 것인 줄 처음 알았어.

그래서 울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방어조차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의 상황이 두렵고 무서워서 울었어.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야? 구구단 책받침도 사 왔는데?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왜? 왜 이런 전쟁 같은 상황을 만드는 거냐고?




다음 날 석희 엄마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리본 핀을 꽂은 인형이 그려진 책받침은 물론 다보탑이 그려진 분홍색 플라스틱 최신 유행 투명 필통과 연필 한 타스, 지우개, 칼, 새로 나오기 시작한 플라스틱 30cm 자와 예쁜 노트에 스케치북까지 문구 종합 세트를 사서 우리 집에 찾아오셨어.


“ 아유~~~ 죄송해요, 사모님! 우리 석희가 은형이가 좋아서 그랬나 봐요. 애들 클 때 다 그렇죠 뭐! 우리 석희 같은 남자애들이 크면 여자한테는 정말 잘할 텐데. 호호호. 얼마나 좋으면 그랬겠어요. 죄송해요. 제가 우리 석희한테 두 번 다시 은형이 괴롭히지 않도록 단단히 교육시킬게요. 은형아! 너 우리 석희하고 바꾸자! 아줌마는 은형이처럼 예쁜 딸을 갖고 싶거든. 지금 우리 집으로 가자! 아줌마가 맛있는 것도 많이 해줄게. 어쩜 ~~ 은형인 저렇게 착해요? 사모님! 은형이하고 석희하고 바꾸죠. 아니면 은형이 커서 우리 석희한테 시집올래? 호호호호. 우리 석희도 은형이한테 잘해줄 거야! 아줌마가 인형도 사줄까? ”


석희 엄마가 우리 집에 찾아왔을 때 난 엄마와 벌통이 놓여있는 장독대 옆 작은 수돗가에서 인형을 목욕시키며 놀고 있었지. 석희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수줍게 웃었어. 그리고 생각했어!


“ 저 벌이 아줌마 입 좀 톡 쏘았으면 좋겠다. ”

금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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