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형 연애기 2화

9살, 사랑에 빠진 음유시인

by 김은형

동훈이를 좋아한다고 깨달은 것은, 도찬이가 전학 오자마자 내 책상 위에 토사물을 가득 꺼내놓았던 그 순간이었어. 아직도 너무나 생생해! 누룽지를 먹었던 도찬이의 토사물이 마치 파도가 밀려오듯 내 책상 옆으로 밀려오던 순간이. 그때 3학년 6반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고, 난 갑자기 동훈이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 거야.


“ 동훈이가 날 보고 있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영숙이가 아닌, 나를 보고 있다. ”


동훈이는 영숙이를 좋아했어. 아니, 그렇게 간주했던 것 같아. 부반장인 영숙이는 부잣집 딸이었고 맨날 예쁜 원피스를 입고 다녔어. 어쨌든 우리의 환상과 로망은, 예쁜 흰색 원피스를 입고 2층 집에 살면서 골목길에서 흙 범벅이 되어 뛰어노는 아이들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연약하고 보호받는 소공녀? 쯤이었거든, 물론 나도 예쁜 옷을 입고 다녔어. 나도 예쁜 옷들이 정말 많았단 말이야! 다만 우리 집은 기와집이었고, 나는 항상 흙 범벅이 된 아이들 주변을 빙빙 도는 위성과 같은 존재였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어. 영숙이는 게다가 우리가 늘 부러워하는 아이스크림을 집에 갈 때마다 사 먹는 부잣집 딸로 간주되는 여자 아이였던 거야.


반장인 동훈이도 아마 그래서 영숙이를 좋아하는 것 같았어. 그런 빛나는 자격조건에 매일 하교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다는 사실은 영숙이를 정말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지.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영숙이는 눈을 뗄 수 없는 어떤 장엄함이었어. 영숙이도 동훈이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어. 왜냐면 아이스크림을 한 번만 혀로 빨아먹게 해달라고 조르는 모든 아이들을 제치고 항상 동훈이가 1등으로 영숙이에게 간택되었거든. 심지어 그것을 깨물어 먹기까지 했다고! 나는 단지 빨거나 핥아먹기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은 소원 하나도 이루기가 힘들었는데 말이지.




난 지금도 혀의 감촉에 매우 민감해. 영숙이가 단 한 번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기를 허락했을 때, 마구 설레며 흥분했던 그 마음 상태를 잊을 수가 없어. 그래서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은 순간의 기분은? 기억할 수 없어. 아이스크림이 혀에 잠시 닿았던 그 찰나의 순간에 나는 아마도 강렬한 쇼크 상태에 있었던 것 같아. 영숙이의 아이스크림을 핥았던 운동장과 영숙이를 둘러싸고 있던 친구들, 운동장의 메마른 흙먼지 등 모든 것을 떠올릴 수 있는데, 정작 그토록 열망하던 아이스크림을 핥았던 순간만 마치 백지처럼 하얗게 증발해버렸어. 색이 나른 느낌? 강렬한 한순간의 빛으로 빨갛던 욕망의 색이 흰색으로 순식간에 탈색된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날 내가 왜 영숙이네 집까지 따라갔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 해가 저물어 밤이 왔고, 영숙이 엄마는 나에게 말씀하셨지.


“ 은형아! 늦었다. 집에 가서 밥 먹어야지. 영숙이는 아버지 진지 잡수시라고 해라. ”


아줌마는 책가방을 무조건 내 어깨에 걸쳐주셨고, 친절하게 현관문까지 열어주셨어.

아줌마는 더 늦기 전에 집에 가서 밥 먹으라 하셨어. 아줌마는 집에 가서 밥 먹으라 하셨어.


현관문을 나설 때 영숙이네 집 거실에 차려져 있던 강낭콩 밥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던 온기와 구수한 냄새는 아직도 생생해! 하지만 나의 현실은 초록 양철 대문 밖의 아주 깜깜한 골목길이었지. 무서워서 꼼짝도 못 하고 울며 서 있던 녹슨 초록 대문 앞에서도 나는 계속 강낭콩 밥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던 온기를 생각했지.

욕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그것이 내게 절대 허락될 수 없는 어떤 결핍이라고 생각한 순간! 그 기억은 더더욱 또렷해지고, 결핍은 달리고, 욕망은 미쳐 날뛰지. 그것을 갖게 되거나 채우거나 소유하게 되기 전까지는 모든 결핍과 의존과 욕망의 광란의 질주가 시작되는 거야! 그 날, 그때, 초록 양철 대문 앞에서 엄마랑 아버지가 정말 간절히 보고 싶었던 것 같아! 다행히 골목길을 지나가던 아저씨가 왜 우냐고 물어서 집에 데려다주셨지.




이층 집이 아닌 한옥 집에 살고 있었던 나는, 영숙이처럼 부반장도 아닌 나는, 누구한테도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였어. 그래서 노래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동훈이의 이목을 나에게 집중시키기 위해서. 음유시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야. 느끼는 대로 말하고 가락을 붙여서 소리를 내면 그냥 음유시인이 되지. 하지만 전문가들에게 질문하진 마! 그냥 멋져 보여서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 뿐이야! 그냥 눈감아주는 센스? 그리고 또 뭐 틀리면 어쩔 건데? 세상 모든 일이 전문 지식만으로는 풀 수 없는 일들도 넘넘 많다는 건 이미 알잖아? 더군다나 그 전문지식이 오류인 경우도 많잖아? 그렇지 않아? 하하하

어쨌든 나는 고무줄놀이하는 사랑의 음유시인으로 변신했어! 우린 그런 상태를 변태라고 말하지.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의 변화! 사랑의 변태 음유시인!


빼빼 말라서 별명이 고구마 줄거리였던 동훈이를 위해 나는 시를 지었고, 거기에 가락을 붙여서 노래를 만들고 고무줄놀이 율동도 만들어냈지. 난 진짜 잔머리 여왕인 것 같아!


♬♭“ 고구마 줄거리, 고구마 줄거리, 빼빼 마른 고구마 줄거리 ”♬♪


아직도 또렷이 기억해! 동훈이가 내 쪽을 보며 보조개가 쏙 들어가도록 씩 ~~웃던 모습을. 그때 나는 확신했지.


“동훈이는 날 좋아하는 것이 분명해! 나의 시와 노래를 좋아하잖아? 영숙이가 아니라 나였던 거야”


그런 확신이 들자 난 더욱 열정을 다해 큰 목소리로 노래하고 고무줄을 뛰었지. 그 아름다운 보조개를 다시 또 보기 위해서 말이야! 그런데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의 ‘야생마’가 러시아인들을 울렸다면, 나는 끝내 ‘고구마 줄거리’라는 음유 시와 노래로 동훈이를 울리고 말았어.


“그만해! 그만 하라고! ”


고무줄놀이를 제지하며 소리치는 동훈이 말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목청을 높여 내 노래를 따라 부르자 동훈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끝내 내 사랑노래에 감동받아 울고 말았던 것 같아. 물론 고무줄놀이는 계속되었지. 날이면 날마다.


♬♭“ 고구마 줄거리, 고구마 줄거리, 빼빼 마른 고구마 줄거리 ”♬♪


그 후 동훈이는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어. 그럴수록 영숙이는 아이스크림을 더 자주 더 많이 사는 것 같았고, 간택당한 동훈이는 더 많은 아이스크림의 성은을 받았지. 가증스러운 영숙이 어깨를 아주 콱 깨물어 주고 싶었어. 진심을 이야기하자면, 아마도 얄미워서 깨물어 죽이고 싶었을 거야! 마치 한 입 깨문 아이스크림이 입에서 녹아 없어지듯이 영숙이가 사라지길 바랬던 것 같아. 하지만 그녀 자체가 아이스크림이 될 수는 없었어. 그런데 감사하게도 드디어 내게 기회가 왔던 거야! 동훈이의 눈길을 받을 수 있는 기회! 그 기회를 전학 온 내 짝꿍 착한 도찬이가 전학오자마자 한 큐에 만들어주고 있었어.




도찬이의 토사물이 내 책상으로 밀려들고,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난 얼른 일어나 양동이와 걸레를 가져와서 도찬이의 토사물을 치우기 시작했지. 선생님도 아이들도 모두 나를 지켜만 보고 있었어. 나는 선생님의 허락을 받을 것도 없이 수돗가로 갔고 곧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어!

동훈이가 나를 따라서 수돗가로 오지 않았겠어? 오~~~ 마이~~~~ 갓~~~~~~~~~~~

그 순간도 기억할 수 있어. 동훈이가 어떤 표정으로 날 봤는지, 보조개는 들어갔는지, 내게 어떤 말을 건넸는지도... 다시 또 백지처럼 모든 기억과 감정과 감각들이 하얗게 바래져 가고 있었어. 아마 내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그 터질 듯한 심장 상태를 표현할 수는 없어! 그동안 뛰지 않은지 너무 오래돼서 이젠 적당한 단어를 끄집어낼 수 없어. 어쩌면 수줍었던 것도 같아. 난 허둥거렸지. 토사물이 든 양동이를 먼저 비우고 씻어 내야 할지, 걸레를 먼저 빨아야 할지..... 동훈이가 내게 말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제발! 제발!

바로 그 순간!

동훈이가 다정하게 내게 말했어.


“ 선생님이 도찬이 또 토했다고 양동이 빨리 가져오래. ”


이제 알겠지? 내 삶에 얼마나 달콤하고 부드러운 감각적 사랑이 존재했었는지 말이야!

내 9살의 사랑의 역사는 혀끝의 감각과 이성을 마비시킨 아이스크림의 달콤함과 음유 시로 점철된 지극히 부드럽고 달달한 사랑의 역사였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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