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형 연애기 3화

12살, 28년 만에 쏟아진 소나기

by 김은형


6학년이 되었고 언니가 대전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언니와 함께 대전으로 전학을 갔어. 나름 시골 부잣집 딸의 유학이라는 자부심이 러플 실밥이 풀려나간 나일론 블라우스마저 아름답게 빛나게 했지. 대전으로 전학 가던 날은 나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확인한 날이었어.


당황스러웠지. 교실에서 훌쩍거리며 친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엄마와 대전 선화초등학교로 향하는 나를 따라 정말 많은 아이들의 행렬이 이어졌어. 아이들의 눈물과 울음소리는 교실, 복도, 운동장까지 따라왔어. 내가 이렇게 주목받는 존재였나? 평소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늘 어떤 것에도, 어떤 팀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였던 것 같았는데? 요즘 표현으로 간단히 말하면, 왕따? 그렇다고 아이들과 놀지 않은 것은 아니야. 다만 아이들이 하는 모든 놀이가 너무나 따분해 보였어. 소꿉장난과 인형놀이만 빼고 한 번 이상은 재미가 없었어. 나는 주로 놀고 있는 친구들 주변에서 낡은 시멘트 담벼락에 난 금과 거미줄의 패턴을 관찰하거나 땅바닥에서 자라는 잡초나 이끼 등의 모양을 관찰하며 혼자 놀았어. 학교를 다니기는 했지만 친구라는 존재의 중요성에 대해 아무런 감각이 없었어. 그냥 그들은 공기처럼 당연히 내 주변에 있는 무엇 인가일뿐이었던 거지.


초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면, 내 의식 전반을 차지하고 있던 생각은 “무료함”이었던 것 같아.

여름이 싫었어. 재미도 없고 할 일도 없는데, 너무 길었어.

겨울이 싫었어. 재미도 없고 할 일도 없는데, 역시 너무 길었어.

아이들은 늘 같은 놀이를 했고, 밥상의 반찬도 특별할 것이 없었고, 엄마의 잔소리와 학교의 일상도 늘 반복적인 같은 것이었거든. 봄과 가을도 단지 하나의 언어적 감각이었을 뿐 정말 내 삶에 들어와 있는 계절은 아니었어. 매일매일 일기를 쓰면서도 일주일이 7일 단위로 운영된다는 것도, 매일매일이 하나의 요일로 구분된다는 것도 몰랐어. 시간 자체에 둔감했다고 해야 할까? 아무런 자극 없는 그런 지굿지긋한 무료함이 나로 하여금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더욱 방해했지.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아이들이 나의 전학 소식을 듣고 줄줄이 눈물을 흘리며 교실과 복도를 메우고 있었던 거야!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것은 큰 구경거리였는지도 모르겠어. 한적한 시골 동네에 늘 같은 사람과 같은 생활, 같은 사건이 반복되는 무료함 속에 누군가가 그 조직을 이탈한다는 것 또한 하나의 큰 사건이 아니었을까?


항상 내 허리를 두 손으로 끌어안고 다녔던 우리 반 친구 미자의 통곡은 공감이 가더라. 미자는 내가 전학 간 뒤 일주일 만에 나를 따라 같은 학교로 전학을 왔다가, 일주일 내내 나를 만나지 못하자 다시 일주일 만에 금산으로 전학을 갈 정도로 나의 열혈 펜이었거든. 하지만 민영이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어.

민영이는 그날도 언제나 축구를 하며 날 괴롭히던 교문 앞쪽 축구골대 앞에 서있었지만 그날은 왠지 날 괴롭히러 다가오지는 않았어. 민영이는 그냥 나를 바라보며 서있었어. 좀 이상하고 서먹한 느낌이었던 것 같아. 아니, 울고 있었나? 아무튼 민영인 그렇게 잊혔어. 그런데 내가 40세가 되던 해 5월이었나? 시골 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는 친정집에 갔다가 우연히 민영이와 학교 앞에서 마주친 거야. 교문엔 중앙초등학교 총동창회 체육대회 현수막이 걸려있더라. 그런데 궁금하지 않아? 내가 28년 만에 만난 남자 동창을 어떻게 바로 알아볼 수 있었는지? 너무너무 놀랍게도, 그 친구는 내가 전학 가던 날 교문 앞 축구 골대 앞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인 거야! 키만 조금 컸나? 정말 완전 깜짝 놀랐어! 그 친구도 물론 단번에 날 알아보더라고.


“ 은형이 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대로야! 6학년 때 너 마지막으로 봤을 때랑 똑같아! ”

“ 하하하. 너도 그대로인데, 농담이 늘었구나? 그런데 너 초등학교 때 왜 그렇게 나를 괴롭혔어? 깡패라는 별명만 선명하게 떠올라. ”

“ 야! 아직도 모르냐? 남자애들이 여자애들 괴롭히거나 심하게 장난치는 건 다 좋아서 그러는 거야.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우리 와이프가 알 정도잖아.”

“ 뭐라고? 좋아서 괴롭혔다고?”

“ 그럼 뽀뽀라도 했어야 했나? 너만 보면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고. 뽀뽀는 고사하고 너한테 말하는 것도 어려웠어. 그러면 그럴수록 자꾸 널 괴롭히고 싶은 거야! 어떻게든 너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거든. 그때 내 맘 같아선 너랑 당장 결혼해서 같이 살고 싶었어!(으악) 너 만 생각하다 보니 키도 못 컸잖아. 하하하.”

“하하하, 그러네? 하지만 그 덕분에 내가 널 금방 알아봤잖아. 너야말로 6학년 때 운동장에서 서있던 모습 그대로다. ”

“ 너 운동장에서 나랑 마지막으로 본거 기억하는구나? ”

“ 응, 네가 평소와 좀 많이 달라서 이상했지. 평소엔 짐승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을 빛내며 나를 때리러 왔을 텐데 그날은 너무나 얌전하더라고? 난 네가 우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어. 하하하”


어? 그런데 말이지, 내 웃음소리가 다 끊어지기도 전에 나는 뭔가 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말았어. 자신을 상대로 농담을 던지며 웃고 있는 내 앞에 서 있는 젊지 않은 남자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차올라 오고 있는 것 아니겠어?

아.... 이 당황스러움을... 아... 어쩌지... 어쩌지...어쩌지........


그는 눈물인지 침인지 모를 무엇인가를 꿀꺽 삼키며 다시 내게 말하기 시작했어.


“6학년 때 은형이 네가 우리 반이 된 이후 나는 아주 오랫동안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아니, 그냥 너만 생각했어. 왜인지 모르겠어. 그냥 너만 생각했다고. 왠지 항상 나의 삶에는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내가 너 때문에 죽을 뻔했던 사실도 모르지? 그것 때문에 엄마 아버지가 너하고는 절대로 만나면 안 된다고 하셔서 내가 두 번 다시 너를 찾아 나설 수 없었던 거야!”

“ 응? 뭐라고?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도대체 내가 왜 너를 죽게 할 뻔했단 거야? 그리고 너네 부모님은 날 알지도 못하시잖아? 진짜 갈수록 태산이네! 말 좀 차근차근 처음부터 해봐! 너무 궁금하다. 왜 넌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건지 꼭 알아야겠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하거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벼운 척하며 물었지만, 내가 왜 민영이 삶에 그토록 진지하고 깊이 들어가 있었는지가 나도 점점 진지하게 궁금해졌어. 좀 심각했나? 암튼 이건 그냥 보통 이야기가 아니구나 하는 무게감을 직감적으로 느꼈던 거지. 잘은 모르지만, 내가 민영이의 삶에 가졌던 무게감과 부피가 일반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어.

그때 민영이가 내 팔목을 잡아끌며 말했어.

“ 은형아! 이리 와! 뜨겁겠다. 네가 그늘 쪽으로 와! 시상식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가 없네. 여기서 잠깐 더 이야기하고 차라도 한잔 마시자.”

“응”

“ 너 전학 가던 날 생각나? ”



“ 응, 너 축구골대 옆에 서 있었잖아. 6학년 때 너 맨날 거기 있었잖아. ”

“ 그날 은형이 너 전학 간다는 이야기 듣고 화장실 가서 토했어! 아마도 어린 맘에 충격이 컸나 봐. 막 눈물이 나면서 구토가 나오더라. 그래서 너 마지막 인사할 때도 나는 화장실에 있었어. 그런데 돌아와 보니 네가 벌써 교실에 없더라고. 미칠 것 같더라고. 네가 벌써 가버렸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막 뛰어나가니까 너를 따라가는 아이들의 긴 행렬이 보이더라? 그래서 내가 매일 널 기다리던 축구 골대 옆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가서 널 기다린 거야! 그동안 괴롭혀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고, 널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리고 더 간절했던 말은, 전학가지 말라는 말이었어. 그런데 막상 네가 가까이 오니까 눈물만 자꾸 나고 막 서러운 거야! 너한테 말은 할 수 없고, 너를 당장부터 볼 수 없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고, 눈물은 자꾸 솟아오르고...... 그런 사이 너는 나와 눈을 마주치는 듯싶더니 엄마를 따라 가버렸어. 난 목이 매여서 말도 못 하고.

그게 내가 너를 본 마지막이었어. 그때 내 가슴에 불붙었던 것 알아? 정말 무지 뜨거웠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고 괴로웠어. 물을 마셔도, 울어도, 그 뜨거운 느낌이 가시지를 않는 거야! 결국 나는 그냥 간신히 집으로 왔고, 다음 날 결석했어. 무지 많이 아팠어. 그렇게 앓고 난 뒤 일주일쯤 지났나? 네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는 거야! ‘은형일 보지 않고는 안 되겠다! 은형일 만나러 가자!‘ 그냥 그 생각밖엔 없었어. 그래서 대전 가는 버스에 무작정 올랐어. 마침 이모가 대전에서 살아서 나는 곧잘 혼자서 대전에 놀러 가곤 했었거든. 버스를 타고 대전 터미널에 가서 사람들한테 선화초등학교가 어디인지를 물어물어 너를 찾으러 갔고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어. 그래도 널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내 가슴은 기쁨과 희망으로 날뛰었지.

너 기억나? 네가 7월 달에 전학 간 거? 장마철이었어.

어쨌든 난 네가 전학 간 학교를 찾았고, 이제 드디어 너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정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어. 신발을 신은 채로 무작정 교무실을 찾아 들어갔지. 선생님한테 금산에서 전학 온 6학년 김은형을 찾으러 왔다고 말했어. 그랬더니 너희 반이 모두 합창대회를 나가서 네가 학교에 없다는 거야! 그때의 절망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어! 그냥 죽을 것 같았어. 아니, 이미 네가 전학 간 후로 내 영혼은 육체를 이탈한 것 같았어. 늘 머릿속이 허공에 떠서 빙빙 돌면서 내 가슴을 뜨겁게 담금질하는듯한 느낌! 정말 너무너무 괴롭더라!

그날 다시 구토감이 몰려왔어. 그래서 걷기 시작했어. 마구 쏟아지는 장마철 소나기를 철철 맞으면서 이모네 집까지 걸어갔어.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이모네 집을 찾아갔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그냥 울었어. 계속 눈물이 솟구치던 기억만 생생해! 엉엉 소리 내어 울면서 걸었던 것도 같고, 그냥 눈물만 흘렸던 것도 같고. 모르겠어! 모두 다 기억할 수 없어! 하지만 네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내 심장에 미친 듯이 타오르는 불을 쏟아지는 소나기도 식힐 수 없었어! 죽을 것 같았어! 죽고 싶었어! ”



압도당하다!

나는 민영이가 쏟아내는 13세 소년의 사랑이야기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어!

멀쩡한 마흔살 5월 하늘에 갑자기 12살 7월의 억센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지. 나는 그 순간 완전히 28년 전 민영이가 맞았던 그 소나기 속에서 13세의 민영이를 만나고 있었던 거야! 물리학의 어떤 이론에서는 시간은 단지 개별적인 개념이나 관념에 불과하다고 한다더니 어쩌면 그 말은 진리일 거야! 이미 과거에 있었던 사랑을 찾아 나선 13세의 어린 소년의 절망과 슬픔이 내 가슴에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으니까 말이지.

아~~~~ 사람의 진심이란 것은 이토록 강렬하고, 이토록 온전히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거구나!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거구나!


내 앞의 민영이는 아이 둘의 40대 유부남이 아니라 사랑과 비에 젖은 13세 소년이었어. 어쩌면 이런 것을 기적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민영이와 내가 서있는 교문 앞에만 28년 전 여름 소나기가 쏟아져 내리는 기적... 내 가슴속에 갑자기 일기 시작한 소용돌이도 쓰나미 급이었어! 하지만 난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척하며 말을 이어갔지. 40대쯤 되면 여우 같은 가면을 쓰기 마련이잖아? 유부남 유부녀로 만난 초등학교 동창으로 성숙한 자신의 면모를 좀 뽐내줘야 하잖아? 마치 품격 있게 살아온 것처럼 말이지. 그리고 품격 있는 사람인척. 어쩌면 동창회의 최고의 묘미랄까? 동창회는 그래서 재밌잖아? 앙큼한 존재들의 집합체라?


“ 하............................................................................. 정말 말이 않나 온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상상할 수도 없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그래서 넌 왜 죽을 뻔한 거야?”

“ 은형이 넌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 그런데 지금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

“ 그게 뭔데? ”

“ 넌 여전하구나?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윈 관심 없는..... 너 내 눈에 지진 일어나고 있는 거 안 보여? 나 지금 다시 6학년이 된 것 같다고. 그때, 그날의 감정이 고스란히 다 올라와. 나도 놀랍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말이지. 넌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늘 내게 무심하던 눈빛까지 여전해. 왜 나는 너에 그런 무심한 눈빛이 그렇게도 좋았던 걸까? 내 앞에 있는 넌 분명히 금은형 맞지? 금은형이지? 나 좀 설레여. 다시 심장이 뜨거워! 6학년 때처럼 심장이 다시 불타기 시작하는 것 같아. 그런데 네가 내 앞에 있는 게 너무 설레이고 너무 괴롭다!”


아! 진짜 내 앞에 있는 남자는 진심을 말하고 있구나. 그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이야기들이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휙휙휙 지나가고 있는 것이 내 눈으로도 보였다. 아! 이런 게 동기감응이야? 감정을 공감하고 공유하는 거야? 아님 전이야? 전염이야? 전파야? 도대체 뭐야? 도대체 뭔지는 모르지만 나까지 점점 고통스러워져! 아~~~ 이 감정의 쓰나미를 멈춰야 해. 멈춰 줘야만 해!


“ 미안! 미안해! 괴로우면 그만 이야기해! 충분히 들은 것 같아. 그냥 내가 미안해! 내가 그냥 너무 미안해진다. 너 정말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서 갑자기 내가 너에 소나기 소설 속으로 퐁당 빠진 것만 같아. 나야말로 너무 놀랍고 혼란스러워. 내가 왜 너한테 미안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냥 미안해! ”

“ 아니, 아냐! 오늘은 다 말할 거야! 네가 얼마나 나쁜 아이였는지 말이야!”

“ 정말 괜찮겠어? 내가 사과할 일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다시 사과할게.”

“ 넌 참 여전하구나! 그냥 착하기만 한 맹탕, 무심한 눈빛으로 늘 혼자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던....... 넌..... ”

“ 어? 너도 느꼈구나? 지금도 사람들이 그래서 많이 열 받아해! 옆에 있어도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어쩌겠어? 그냥 내가 그런 사람인 걸. 널 아프게 하거나 힘들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내 본성인 거야. 그걸 이해하면 네가 좀 덜 힘들까?”

“ 난 그날 우리 이모를 보자마자 쓰러져서 5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대.”

“ 어? 왜? 너 왜 그랬어? 내가 그냥 막 너무너무 미안해지잖아. 너 정말 왜 그런 거야? ”

“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병이 난거지. 상사병.”

“ 너 정말..... ”

“ 아냐 아냐! 은형이 네가 울 것 같은 표정 지으니까 내가 또 죽을 것 같잖아. 어린아이가 여름 소나기를 한 시간 넘게 온통 맞고 걸어가서 급성 폐렴으로 열이 올라서 사경을 헤맸대. 네가 그런 것 아냐! 그러니까 그런 울 것 같은 표정 좀 그만 풀어! 그만 이야기할게. 미안해! 내가 미안해! 너한테 부담 주려고 그런 것은 아니야! 너무 반갑고, 너무 보고 싶었던 얼굴이고, 널 보니 그냥 또 막 서럽고 그래! 그래서 그냥 막 이야기한 거야 ”


지문 ( 민영이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

지문 ( 은형이의 눈시울도 붉어진다. )


“ 민영아!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돼. 나 이제 마흔 살이야! 다 이해했어! 이해할 수 있어! 아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미안해! 그냥 내가 다 미안해! 너 그렇게 아픈지 몰랐어! 정말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 내가 미안해! 널 아프게 해서 미안해 ”


지문 ( 민영이의 눈에서 눈물이 툭하고 떨어진다.)

지문 ( 은형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툭하고 떨어졌다.)



“ 여보! 체육대회 시상식 해야 한다고 모셔오라는데? ”


지문 ( 민영이가 눈물을 훔친다. )

지문 ( 은형이도 눈물을 훔친다. )


“ 어? 당신 울었어? 옛날 좋아했다던 은형이란 여자 동창이 이분이구나? 한눈에 봐도 금방 알겠네! 그렇게 맨날 첫사랑 타령하더니? 너무 기뻐서? 그래서 우는 거야? ”

민영이의 아내는 자신의 남편 쪽으로 바짝 붙으며 남편의 눈물을 손으로 쓱 닦아주며 따뜻하게 이야기했어.

그때 그녀를 사랑하는 그녀의 남편이 나에게 말했어.


“은형아! 나 잠깐 시상식만 하고 올게. 대상 상장 하나만 시상하면 돼..... 가지 말고 있어! 아니, 함께 가서 본부석에서 잠깐 기다릴래? 다른 친구들도 왔는데 얼굴 보고 가! 곧 돌아올게.

알겠지? 가지 마! 응? 알겠지? 가지 마! 응? 알겠지? 가지 마! 가지 마 알겠지?”


지문 ( 알뜰하게 남편을 사랑하는 애교스럽고 따뜻해 보이는 아내는 남편의 팔짱을 꼭 낀 채 매달리듯 먼지가 날리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남편과 함께 조회대 앞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남편도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28년 전 은형이도 7월의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친정집을 향해 사라졌다. )




5분 거리도 채 되지 않는 친정집까지 걸어가면서 나도 28년 전 소년처럼 이마에 열이 오르고 온 몸이 아파오는 것 같았어.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13살 소년의 지독하고 슬프고 순수한 사랑이 내가 몰랐던 내 삶의 또 하나의 장면이었다고 생각하니 무지 아팠어! 그리고 그 비현실적인 감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 삶이라고 할 수도 없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협곡처럼 좁지만 건널 수 없는 너무나도 깊은 간극의 통증이랄까?


‘클라인의 깡통’ 알아?

내가 중학교 1학년, 13살에 읽었던 가장 쇼킹한 과학책에서 읽었던 건데, 4차원적 공간 구조의 컵에 갇힌 파리는 3차원의 입체에 시간까지 겹쳐진 4차원적 공간에 동시에 갇혀서 그것을 깨뜨릴 경우 끝끝내 살아 나올 수 없다는 거였어. 파리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두 개의 차원에 걸친 그 상태 그대로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그냥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지. 민영이를 만난 직후 나는 아마도 클라인의 깡통에 갇힌 파리의 심정을 완벽하게 이해했던 것 같아! 그리고 뒤늦게 첫사랑에 빠진 마흔 살 여자의 설레이는 맘으로 민영이의 사랑이야기를 남편과 아이 몰래 삶이 무거워질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견뎠지.


내가 13살 땐 클라인의 깡통에 갇힌 파리의 신세를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존재로만 생각했는데, 마흔 살이 되어 내가 바로 그런 28년이란 초월적 시공에 아무도 모르는 사랑 이야기를 간직한 파리로 갇히고 나자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어. 나도 죽지 않기 위해선 그냥 그 초월적 시공 안에서 죽지도 살지도 않은 채로 그냥 사랑받았던 온전한 존재로 갇혀 있는 것이 나의 생존을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이란 걸 알았던 거지.


어느 차원에 완벽하게 속해있다는 게 또 뭐 대수야?

사실은 우리가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잖아? 우주적 진실에 대해 누구도 쉽게 정답을 알 순 없어! 어쩌면 잠든 것도 그런 것 아닐까?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행복한 꿈을 꿀 때 우린 차원 이동하기 싫어지잖아? 잠에서 깨기 싫잖아? 장자의 호접몽과도 같다고 해야 할까?

그냥 3차원이든 4차원이든 살아있으면 되는 거지 뭐!

생명으로...

그래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 삶의 행복이거나 핵심 일지도 몰라. 그런 거겠지 뭐. 아마도....


암튼 내 12살 여름 소나기는, 28년 후에야 비로소 내 삶 속으로 쓰나미처럼 한번에 쏟아져 내렸던 거야!


keyword
이전 03화금은형 연애기 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