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 묄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볼테기가 귀엽다.
이야기의 시작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꼬북칩 과자를 한 봉지나 먹어버렸어! 물론 필라이트 맥주 500ml 한 캔을 함께 마셨지. 난 요즘 이 커다란 맥주가 맘에 들어! 가격이 저렴해서가 아니라, 캔에 그려져 있는 코끼리 때문이야! 덩치도 크고 귀는 더 커다란 코끼리가 꼬리에 매단 풍선 하나만으로도 거뜬하게 하늘을 날아오르고 있거든! 점점 더 코끼리가 되어가는 내 몸에 대한 위안이랄까? 위로랄까?
아줌마가 되면 왜 꼭 허리와 배가 빵빵하게 공기를 주입한 튜브처럼 변하는지 모르겠어! 물론 내 몸매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늘 예외는 있기 마련이니까. 설마 이토록 도발적인 이야기와 섹시한 사랑이야기를 쏟아내는 사람이 튜브처럼 빵빵한 도넛형 몸매 일리는 없잖아? 단언코! 빵빵한 튜브 정도는 아니야! 바람이 아주 조금 빠진 튜브 정도라고 할까?
암튼 중년 여성들은 자신들의 몸매에 매우 불만이 많아! 그 이유의 근원이 뭔지 알아?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대부분일 거야! 왜? 구석기시대 묄렌도르프의 비너스 이후로 대부분의 남자들은 날씬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통념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생태 심리학자들도 대부분의 남성들은 허리가 잘록하고 엉덩이가 큰 여성들을 선호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더라고. 그런데 난 생각보다 똑똑한 것 같아! 왜냐고? 일반론을 잘 믿지 않거든! 도대체 왜 꼭 늘씬하고 예쁜 여자들만 사랑받아야 해? 그것을 꼭 일반화하고 보편화해야 해? 아닐 수도 있잖아? 내가 그래서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 알아? 17살 때?
나도 17살 때는 진짜 입김으로 훅 불어도 쓰러져나갈 정도의 몸매였다고. 오죽하면 부모님이 “쟤는 피지도 못하고 죽게 생겼다”라고 걱정하셨겠어? 하하하하. 만약 내가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라는 소설을 고등학교 때 읽었더라면 상처가 조금 덜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의 매우 고지식한 여고생이었던 나는 도저히 ‘피아노 요정’인 민기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 문제는 은정이었어!
민기는 같은 서클 친구였어! 그런데 어느 날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나한테 쪽지를 하나 건네주더라? 자기 고민을 상담하는 내용이니까 꼭 집에 가서 혼자만 읽으라고 신신당부하면서 말이야! 그때 당시 나는 매우 정직하고 약속을 잘 지키는 정의로운 모범생이었기에 민기와의 약속을 지켰지! 그래서 집에 돌아와 쪽지를 펼쳐보니
“ 금은형!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면 아마도 나는 하늘의 달을 보면서 널 생각하고 있을 거야! 달님께 기도하면서 말이지! 널 처음 봤던 신입생 환영식에서 허리를 잘록하게 벨트 맨 교복 입은 네 모습이 너무 예뻤어! 넌 정말 한 떨기 코스모스 같았어! 내가 널 좋아해도 될까? 허락해줄 수 있어? 나는 네가 교복 입은 모습이 너무 좋아! 다음 주 서클 모임에 올 때 내 질문에 대답해줘! 너랑 다시 젓가락 행진곡 함께 연주하고 싶어! 모든 애들 앞에서
- 너의 진실한 친구 민기가-
* PS : 다른 친구들한테 말하지 말고 너만 비밀로 알고 있어! 특히 은정이 에게 절대 말하지 마! 요즘 걔가 날 좋아하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워.
햐~~~ 글쎄 내가 드디어 17살,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첫 연애편지를 받았던 거야! 어깨가 들썩했지! 왜냐면 민기는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거든. 서클 부회장인 데다가 팔방미인이었어. 사실 나도 그 친구한테 약간의 설렘이 있었지. 내가 피아니스트 조성진을 좋아하는 이유가 어쩌면 그 친구에 대한 추억 때문일지도 몰라! 뭐 말이 되든 되지 않든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야!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가자마자 민기와 함께하는 서클에서 행사가 있어서 임원진들은 먼저 가서 일을 해야 했어. 그런데 강당에 들어설 때 누군가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연주하고 있는 거야! 그게 바로 민기였어! 나는 순간 내 눈이 홀랑 뒤집어지는 것을 감지했지! 피아노 치는 남자애들은 왜 그토록 멋져야만 하는 거야? 평소 아무 감정도 없었는데 피아노 치는 민기는 완전히 ‘피아노의 요정’ 같더라? 눈을 뗄 수가 없었지. 나는 홀린 듯 민기 옆으로 다가가 박수를 쳤지. 그랬더니 민기가 자기 옆자리를 내주며 함께 젓가락 행진곡을 치자는 거야! 무조건 앉아서 민기가 시키는 대로 건반을 두드려댔지. 함께 연주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민기가 살짝살짝 내 얼굴을 바라보며 눈으로 전해오는 감정과 호흡이 너무 좋았어.
나는 지금도 연주 무대에서 연주자들이 음악으로 서로 교감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 내가 프로 연주자라면 얼나마 좋을까? 구스타프 두다멜이 엘 시스테마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연주할 때 연주자들과 나누는 열정에 찬 눈빛과 웃음과 환희를 나도 함께 나눌 수만 있다면...
암튼 민기와 나는 그날 처음으로 함께 젓가락 행진곡을 두드리면서 서로 조금 설레었던 것 같아. 그리고 그다음 주에 바로 내게 쪽지를 건네 준거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어. 나도 설레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그래서 그다음 주에 민기가 말 한대로 조금 일찍 서클에 갔어. 그런데 나 말고 은정이가 먼저 와있더라? 민기는 피아노를 치고 있고 은정이는 그걸 바라보고 있더라고. 나는 좀 서먹해지는 기분을 느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척하며 은정이 옆에 앉았어. 드디어 민기는 연주를 마쳤고, 우린 박수를 쳤지. 그러자 민기가 우리가 앉은자리 쪽으로 인사를 하며 다가왔어. 그리곤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지. 나도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민기가 약간 좋아지는 느낌이더라? 그런데 그때 갑자기 옆에 있던 은정이가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민기 앞으로 쓰러지는 거야! 민기는 당황하면서 쓰러지는 은정이를 안아 일으켰어! 은정이는 나보다 두 배정도는 통통한(뚱뚱한으로 읽어줘!) 아이였어!
은정이를 간신히 의자에 앉힌 민기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더라.
우리도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인지라 우왕좌왕하면서 택시를 부를까? 119를 부를까? 하고 있는데 은정이가 약간 정신이 든 듯 눈을 살짝 뜨면서 이제 괜찮으니까 민기한테 자기를 조금 부축해서 화장실까지만 데려다 달라는 거야! 세수를 하면 괜찮아질 것 같다고.
민기는 당장에 일어나서 은정이를 부축해서 화장실로 갔고, 그 둘이 돌아올 때는 은정이가 민기의 왼팔에 매달려 팔짱을 끼고 같은 어깨에 살짝 고개를 기댄 채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어? 나는 바보같이 안심했지. 은정이가 다치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그 사건 때문에 나는 민기의 편지에 대답할 겨를도 없었고, 민기랑 다시 젓가락 행진곡을 연주하지도 못했어. 그런데 그다음 주도 또 똑같은 사건이 벌어진 거야! 은정이가 또 민기 품으로 쓰러졌고, 그다음 주도 또 쓰러지고, 그다음 주도 또 쓰러지고... 무한반복 자동재생! 카세트의 '오토리버스' 기능이 사람에게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어!
우린 뭔가 냄새를 맡기 시작했지! 수군대는 우리에게 민기가 말했어!
“ 난 코스모스처럼 하늘거리는 날씬한 애들보다 요즘 통통한 여자애들이 좋더라?”
“ 뭐라고? 너 은정이 좋아하는구나?”
“ 하하하. 꼭 그런 것은 아닌데,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또 그 사람이 나에게 의지해오는 것도 기쁨이란 걸 알게 됐어. 그리고 은정이 통통한 볼테기가 귀엽잖아. 팔짱 끼고 징징대는 것도 귀엽고. ”
그때 옆에 있던 영찬이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아마 우리 모두 같은 표정이었을 거야! 특히 나!)으로 말했어.
“ 몸매가 육감적이라서 좋다며? 인마! 좀 솔직해라! 너 여성관이 달라졌다면서? 이제 가시처럼 마른 여자는 싫다며? 쿠션처럼 폭신폭신한 여자가 좋다며?”
아~~~~~ 레마르크의 <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17세 때 읽었어야 했어! 서부전선 벙커에서 주인공과 함께 살찐 와이프와의 사랑만을 추억하면서 고통을 견디던 동료가 1년 만에 휴가를 얻어 아내를 만났는데, 굶주림에 바싹 마른 아내를 인정하지 못하고 그대로 집을 나와서 자살해버리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있었지! 난 레마르크의 소설을 읽고 처음으로 세상 모든 남자들이 날씬한 여자들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어! 아니, 통통하거나 뚱뚱한 여자들만을 사랑하는 남자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 같아! 그때서야 비로소 민기를 이해할 수 있었어! 어쨌든
“나쁜 놈”
나한테 쪽지로 고백하자마자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감각의 숲에 발을 들여놓다니....
피아노 덕분에 처음으로 남자한테 약간 설렜는데, 설레자마자 나는 바로 혼자서 사색과 명상의 숲으로 직행해야 했어!
도대체 남자들의 심리는 알다가도 모르겠어!
은정인 살때문에 교복 단추 사이가 다 벌어져서 레이스 속옷까지 보이던 것도 몰랐나? 창피하게?
어? 설마?
혹시 그래서?
이런 이런......
왜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런 상상이 가능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