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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메밀 Sep 21. 2023

처음으로 정신과 갔던 날

척척박사님 알아맞혀보세요


    사실, 병원에 갈 생각은 정말 없었다. 그래서 조울증으로 고생하던 친구가 정신과에서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아먹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는 얘기를 해 줬을 때에도, 심리상담사 선생님께서 약물치료를 조심스럽게 권유하셨을 때에도, 다면적 인성검사 mmpi-2의 우울 척도가 임상적으로 유의한 정도로 높은 수치였을 때에도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핑계는 아주 다양했다. 가끔 정도가 심할 뿐이지 항상 우울한 건 아니니까, 정신과 진료 기록이 있으면 실손보험 가입이 어려우니까, 약을 먹게 되면 가족들에게 들킬 것 같은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곤란해서, 비보험으로 진료를 받자니 돈이 많이 들 것 같아서, 병원에 갔는데 선생님이 불친절해서 내가 상처받을까 무서워서, 완치가 없다고 하던데 그럼 평생 약을 달고 살아야 하는 건가 두려워서......


    여러 이유를 늘어놓았지만 진짜 이유는 단순했다. '그럼 나는 정신병자인가?'라고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치료를 받는 게 당연한데,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결국 나를 병원에 이끈 건 나 자신이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하루를 버티기도 힘들 정도로 아팠기 때문이다. 이렇게 매일 울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잘' 살고 싶었다. 좋은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감기몸살 증상이 있을 때, 이게 코로나19인지 감기인지 헷갈리면 코로나19가 아니라고 했다. 코로나에 걸리면 아프기 시작하자마자 딱 '아, 이놈이다.'라는 느낌이 올 정도로 감기와는 증상과 통증 정도가 다르다고 고 했다. 나한텐 병원에 찾아가기 직전의 우울이 그랬다. '이번 우울은 평소랑은 다르다. 이건 도저히 내 의지만으로는 극복을 못 하겠다. 이제 진짜 병원에 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 이 상태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제 발로 찾아간 병원은 맥이 빠질 정도로 다른 병원이랑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진료에 들어가기 전에 문장완성검사와 우울척도검사를 했다는 것 정도? 우울척도검사는 최근 일주일 동안 주어진 항목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 체크하는 형식이었다. 나 말고도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가 많아서 생긴 대기시간 동안 긴장을 덜 수 있었다. 환자들의 연령대도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이부터 80대로 보이는 노인까지 아주 다양했다.


    그렇게 내 차례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어떤 게 힘들어서 오셨어요?"라는 의사의 말을 듣자마자 울음과 말이 마구 섞여 나왔다.


    10년 전부터 우울했다는 얘기, 최근 몇 년 새 우울이 심해졌다는 얘기, 대학교 4학년인데 공부도 취업도 하기 싫은 나 자신이 싫다는 얘기, 이러다 평생 백수로 살게 될까 무섭다는 얘기 등을 했다. 우느라 하고 싶은 말이 전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울척도 검사와 mmpi-2 검사 결과지를 보면서도 선생님은 내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 외에도 문장완성검사의 일부 항목에 대해 질문을 하시길래 대답을 했다. 몇 가지 질문을 더 하더니 의사가 말했다.


    "아주 전형적인 우울증입니다."


    저 말을 들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내 상태가 전형적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흔하다는 뜻이고, 그렇다는 뜻은 치료 사례도, 치료 방법도 많이 알려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평생 이렇게 무기력하고 암울하게 살지 않을 수 있겠다는 기대가 조금 생겼다. 항우울제를 일주일치 처방받았고, 일주일 동안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셨다. 


진료 첫날 썼던 일기


    집에 와서 일기를 쓰는데 마음이 홀가분했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생일 다음날이기도 했다. 나를 위한 선물로 병원 진료를 받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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