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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연 May 14. 2020

근거는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입니다

근거 만들기

좋은 근거와 평범한 근거가 있을 뿐, 없는 근거는 없습니다


주장에는 반드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찾기가 만만치 않다는 점입니다. 검색만 하면 근거가 툭 튀어나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대부분은 노트북이 뜨거워지도록 검색해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맨송맨송한 주장을 현란한 수식어로 감추고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기만을 바랍니다.


하지만 근거는 어떤 상황에서도 넣어야 합니다. 근거는 보물찾기가 아닙니다. 어딘가에 완벽한 근거가 있어서

찾아내는 게 중요한 게임이 아니에요. 오히려 퍼즐 맞추기나 집 짓기와 비슷합니다. 원하는 모양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를 모으는 거죠.

근거는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입니다.
평범한 근거는 있어도
없는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니 근거를 찾을 때는 이런 마음을 갖는 게 좋습니다.


“내 주장에 어떤 근거를 더하면 설득력이 있을까? 찾으면 좋지만, 아니라면 만들어야지.”




없는 근거를 만드는 방식: ‘액티브X를 폐지해주세요’ 사례


제 경험 하나를 얘기하겠습니다. 근거가 없을 때 어떻게 악착같이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몇 년 전 대통령과 장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CEO가 ‘기업이 바라는 규제개혁’을 발표하는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준비 기한이 일주일뿐이라서 회사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담당 부서는 다른 팀이었고, 저는 막판에 용병처럼 투입됐어요. 그러니 제가 설명해드리는 근거는 대부분 해당 부서 직원들이 만든 겁니다.


당시 담당 부서가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으로 누렇게 뜬 상태에서 열 몇 가지 과제를 골라냈는데, 그중 하나가 이거였습니다.

액티브X를 폐지하자


액티브X란 인터넷을 사용할 때 본인 확인, 결제 등을 위해서 설치해야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외국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죠.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인터넷으로 뭐만 하려면 액티브X의 온갖 프로그램을 깔아야 했습니다.

아이언맨도 피해갈 수 없는 액티브X의 굴레 (사진 : 인터넷 유머)


설치하는 시간도 아깝지만, 컴퓨터에 다른 누군가가 제어하는 프로그램이 잔뜩 깔리는 것이므로 보안도 취약해졌습니다. ‘액티브X 폐지 결사대’ 같은 네티즌 모임도 따로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액티브X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하려니 근거가 될 객관적인 자료가 전혀 없는 겁니다. 당연하죠. 공론화된 적이 없으니까요. 우리가 가진 정보는 ‘네티즌 원성이 자자하다’ 정도였습니다.

출처 : 독수리 오형제 (맞나?)

하지만 대통령에게 “네티즌 원성이 자자하니 바꿔주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어떻게든 근거를 찾아 나섰습니다. 대통령이라면 솔깃해서 들어줄 근거를 말이죠.




얼마나 심각한가? 국민은 어떻게 생각하나? 구체적 피해로는 무엇이 있나? 없애면 뭐가 좋아지나?


얼마나 심각한가? - 평범한 사무직 컴퓨터에 400~700개


평범한 직장인이 겪는 액티브X 노출을 조사했습니다. 각자의 회사 컴퓨터에 액티브X 설치 개수를 세 보니 평균적으로 400~700개였습니다. 공식 통계는 아니지만, 표본 사례로는 쓸 수 있는 근거입니다. ‘마포구에 사는 ○○ 씨에 따르면’ 같은 근거니까요. 평범한 사무직 회사원의 컴퓨터에 수백 개가 설치되어 있다니, 정말 심각한 상황입니다.


국민은 어떻게 생각하나? - 불편 88.0%, 폐지 찬성 78.6%


객관적인 근거가 전혀 없었습니다. 액티브X 폐지 결사대가 만든 웃음 터지는 동영상과 짤방뿐이었거든요. 그래서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리서치 회사에 문의해보니 온라인으로만 조사하면 24시간 안에도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액티브X 불편 경험’과 ‘폐지 찬반’이라는 두 질문만 의뢰했더니 하루가 안 되어 800명을 대상으로 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온라인 조사에 발 빠르게 응답할 정도로 인터넷에 능숙한 사람이라면 액티브X를 미워할 가능성이 큽니다. 당연히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불편 88.0%, 폐지 찬성 78.6%’였어요. 유일한 공식 통계라 정부에서도 액티브X를 없앨 때 근거 자료로 계속 활용했습니다.

이것 봐봐요. 다 싫다잖아요. (사진: 파이낸셜 뉴스)

구체적 피해로는 무엇이 있나? - 외국 사람이 못 사요


액티브X는 해외에서의 온라인 결제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범이었습니다. 지금은 상상이 가지 않으시겠지만, 그때는 구매 사이트에 가입하려면 필수적으로 액티브X를 깔아야 했는데, 외국인은 본인 인증이 안 될 뿐 아니라 낯선 나라의 낯선 사이트에서 설치하는 프로그램이 꺼림칙해서 결제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류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때였는데, 외국 팬들이 한류 굿즈를 살 수 없어서 원성이 대단했죠. 그래서 당시 가장 핫했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천송이 코트를 예시로 들었습니다.


이 근거는 ‘천송이 코트…외국선 어찌 사란 말이오’라는 제목으로 주요 일간지에 톱으로 실리기도 했습니다.


없애면 뭐가 좋아지나? - 11조 4,000억 원


액티브X가 없어지고 온라인 유통 시장(e-커머스)이 성장할 경우의 경제적 효과를 계산했습니다. 교수에게 분석해달라고 할 시간이 없어서 선진국인 미국을 예시로 들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GDP 대비 온라인 유통 시장의 규모는 0.26%였는데, 미국은 5배 수준인 1.29%였습니다.


그래서 액티브X 같이 기형적인 규제가 사라지고 온라인 유통 시장이 미국 수준으로 커진다면(GDP 대비 0.26% → 1.29%), 11조 4,000억 원의 경제적 효과가 생긴다고 제시했습니다.


물론 논리에 허점은 있습니다. 액티브X만 없앤다고 온라인 유통 시장이 성장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액티브X 없애면 국민 불편이 사라져요”라는 소리보다는 훨씬 근사하죠.



권위형 근거와공감형 근거를 섞어보세요


‘액티브X를 폐지해주세요’라는 메시지의 논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장 아래 네 가지 이유가 있고, 각 이유마다 근거가 있죠. 권위의 근거와 공감의 근거를 골고루 섞었습니다.

좋은 근거와 평범한 근거가
섞여 있습니다.
하지만 근거가 없는
주장은 없습니다.


이 건의는 현장 반응도 좋았고, 언론에서도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당시 고생하셨던 담당 팀과 본부장의 다크서클에 심심한 위로를 보냅니다.


어떻게든 찾아낸 근거니까요 (사진 : 펭수)




[오랜만에 하는 이벤트] 사인본과 함께 책을 보내드릴께요!! :)


새로운 제 책이 나왔습니다! :)


<일 잘하는 사람은 단순하게 합니다>의 심화편입니다. 강연을 다녀보거나 하면 가장 고민이기도 하고 열광적인 피드백이 있었던 분야를 통으로 떼어서 '일하는 사람을 위한 언어'책을 만들었습니다.


제 메일 주소(mentorgrace@naver.com)월요일(5/18)까지 신청해주시면 10명을 선정해서 다음주 화요일(5/19)에 브런치에 발표하고 제가 사인한 카드와 함께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혹시 그 전에 굿즈를 받으면 그것도 보내드릴께요 :)


참, 제가 보면 브런치 독자님들은 약간 샤이하셔서 잘 신청 안하시더라고요. 그러니 아주 비루한 경쟁률을 예상해봅니다 ㅎㅎ 경품 반, 사람 반인 사내 체육대회 수준의 경쟁률일테니 과감하게(?) 보내주세요 :)


일하는 사람의 언어 도구를 배우고 싶으신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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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잘하는 사람은 단순하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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