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뿌르가 딱히 루트에 있는 건 아니었다. 라자스탄 주의 주도이긴 하지만 블루시티인 조드뿌르를 이미 본 데다, 핑크시티라고 부르기에 자이뿌르는 뭔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온 터였다. 그런 자이뿌르로 향하게 된 건 단순했다. 혼자 온 여행인데 델리 입국 후 공항에서 만난 첫 일행들과 계속 붙어 다녔다. 일행들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만날 정도로 친하고 좋은 사람들이지만, 열흘을 넘게 같이 다니다 보니 며칠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그래서 홀로 떨어져 나와 자이뿌르로 향했다.
기대감이 없어서였을까. 자이뿌르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예쁘고 볼거리가 많은 곳이었다. 눈부신 햇빛에 가려 끝이 안 보이는 노란색 계단의 천문대부터, 입구마다 다른 무늬로 치장한 화려한 문들의 암베르 성 ,자이뿌르가 핑크시티로 불리게 된 데 한몫한 하와 마할까지. 특히나 바람의 성이라 불리는 이름도 너무 예쁜 하와 마할에 푹 빠져버렸다. 하와 마할이 인도의 다른 유명한 유적지에 비해 평가절하 된 데는 주변 환경이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하와 마할의 정면은 좀 멀리 떨어져서 봐야 진면목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앞이 튼 도로여서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한눈에 담기 어렵다. 내부로 들어가면 하와 마할이 왜 바람의 성이라고 불리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전면에 빼곡히 박혀있는 여러 개의 창으로 바람이 들어오는데 바람의 세기에 따라 성 안의 한적함을 부드럽거나 거센 휘파람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흔들어놓았다. 형형색색으로 된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의 그림자가 해가 넘어감에 따라 점점 길어지면 어렸을 때 이리저리 돌려가며 보던 망원경의 황홀함에 빠져든다.
자이뿌르 시티 중심에 있는 대부분의 유적지들이 생각보다 한적해서 한참씩 앉아있다가 자리를 옮겼는데, 하와 마할에서는 오래오래 앉아서 하와 마할 창밖에서 소음과 함께 들려오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한참을 바람의 성으로 불어 드는 바람을 맞으며 앉아있다가 나오는 길. 하와 마할 앞에서 유일하게 호객을 하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할아버지는 아주 수줍게 사진을 찍지 않겠냐고 물어보았다. 보통 유명한 유적지에서는 유적지를 배경으로 피사체의 초상권은 무시한 채 셔터를 마구 누른 뒤, 재빠르게 인화해서 접시나 액자에 넣고 판매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온 터였다. 무시하고 돌아서려는데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손끝으로 아주 오래된 옛날식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 역사서 책에서나 볼 수 있는 낡고 오래된 카메라였다. 증명사진 정도만 찍을 수 있는 , 하와 마할을 배경으로 찍을 수도 없는 카메라였다. 실소가 터져 할아버지에게 예쁘게 찍어달라고 부탁했다.사람이 오가는 인도에 앉아 사진을 찍는 기분이란. 할아버지가 찍어준 흑백 사진은 너무 정직하게 내 얼굴로 나와서 마음에 들진않았지만, 하와 마할을 떠올리면 사진을 찍어준 사진사 할아버지가 같이 떠오른다.
자이뿌르의 내 숙소는 정말 예뻤다. 특징 없이 지어진 체인 호텔보다는 그 나라의 건축양식이나 색을 보여줄 수 있는 특색 있는 숙소를 더 선호하는 편인데 내가 원하는 라자스탄주의 색을 확실히 보여주는 숙소였다.
( 물론 배낭여행자에게는 가격이 제일 중요하겠지만)
화려한 벽 위로 라자스탄 전통 수가 놓은 러그가 곳곳에 걸려있고, 연식이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고가구 위로 오랜 세월 까맣게 사람들의 손을 타 맨질 맨질하게 닳아 흐릿해진 전통 무늬의 장롱도 너무 아름다웠다. 루트탑은 숙소에서 운영하는 부설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자이뿌르가 붉게 물들어가는 선셋을 보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아마도 자이뿌르는 하와 마할 때문에 핑크시티로 불리는 게 아닌, 유난히도 붉은 노을이 온 도시를 핑크 빛으로 물들여서 핑크시티라고 불리는지도 모르겠다.
루프탑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나는 8할은 도시 곳곳에 있는 루프탑 때문에 인도를 사랑한다 여행 대부분의 기억도 수많은 도시들에 있던 루프탑이다. 델리 빠하르간즈에서는 차양막이 길게 쳐진 루프탑에서 정신없는 메인 거리의 소음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자이살메르에서는 성 곳곳을 환히 밝히는 야경을 배경으로 하렘 분위기의 루프탑에서 따뜻한 차를 마셨더랬다. 푸쉬카르에서는 물병에 몰래 소주를 담아 김치와 함께 마시며 해질 녘의 가트를 내려다보고, 비가 와서 정전이 된 루프탑 테이블에 초를 켜놓고 어린 시절 촉촉한 감성에 젖어 일행들과 여러 이야기들을 나눴다. 맥그로드 간즈에서는 Kim's kitchen에서 갓 구운 아무 맛이 나지 않는 스콘과 짜이를 마시며 곧 뿔뿔이 헤어질 일행들과 아쉬움의 인사를. 조드뿌르에서는 파란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루프탑에서 마른 모래 바람을 맞으며 카드를 치던 기억이, 우다이뿌르에서는 해 질 녘의 호수를 내려다보며 호화로운 인도 음식을 먹으며 아지랑이처럼 옛 인도 귀족이 되어보기도 했다.
디유에서는 싸구려 와인 한 병과 오믈렛을 사들고 새하얀 교회 지붕에 올라 유러피안 히피가 어눌하게 치는 기타 소리를 들으며 바다 너머로 해지는 풍경을 보기도 하고, 타지마할을 하루 종일 넋 놓고 보다 주린 배를 채우러 간 루프탑 레스토랑에서 감자전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먹었던 아그라의 짧은 기억도 있다. 해 질 녘이면 아주 작은 마을 오르차 광장에 있는 건물 옥상에 동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다 같이 지는 해를 보기도 하고, 카주라호의 루프탑에서는 너무 많은 새떼가 머리 위로 날아다녀서 무서워했더랬다. 바라나시에서는 갠지스 강을 바라보며 마시던 맛없는 킹피셔 맥주 한 병 두병 세병.
라다크에선 황량한 산과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 위로 오색의 깃발이 휘날리는 풍경을 보며 다 같이 점심을 먹었드랬다.
머물었던 도시마다 루프탑에서 보낸 기억들이 가득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