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세입자 일기 (4)
알뜰살뜰 가꾸던 생애 첫 내 집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었지만 인생이란 늘 그렇듯 뒤통수를 치는 법이어서 계획에 없던 결혼을 하게 됐다.
갑자기 일까지 그만두게 돼 원룸을 세주고 신혼 초기에는 시집에 들어가 살았다. 시부모님과 지지고 볶으며 4개월을 살다가 독립해 우여곡절 끝에 인생의 두 번째 세입자를 만나게 된다.
생후 16개월 된 아기와 뱃속에 둘째, 그리고 출퇴근 거리를 고려해 전셋집을 찾다 보니 서울에서도 당시 땅값이 가장 빠르게 오르던 지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가진 돈은 1억 원뿐. 대출을 풀로 받는다고 해도 다 쓰러져 가는 빌라 아니면, 신축이지만 네 식구 몸만 겨우 누일 수 있는 10평대 투룸 빌라만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너무 절망스러워서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네에 있는 빈집이란 빈집을 다 봤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서울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할까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이 나이 먹도록 돈이 이것밖에 없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좌절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출산일은 다가오고 출퇴근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 입학 등록까지 해놓았던 터다.
그땐 청약이나 공공임대 등에 대한 정보도 몰랐다. 설령 알았다고 해도 그림의 떡이었겠지만 말이다.
현실적으로 최선의 선택은 조금 불편해도 회사와 어린이집이 가까운 신축 투룸이었다. 아기들이 아직 어리니까 비좁은 건 어른만 참으면 될 문제였다. 미니멀 라이프도 유행인데 가구와 장난감 등을 최대한 사지 않으면 된다고 합리화했다.
어렵게 조건이 맞는 집을 찾았지만 신축 빌라인데도 입주 며칠 후에 수도꼭지와 가스레인지 불량이 발견됐다. 임대차 계약 경험이 있었다면 입주 전 필수 체크 사항인 걸 알았을 텐데 사용하다 보니 뒤늦게 알아챈 것이다.
집주인에게 수리를 요청했지만 입주 후 며칠이 지났기 때문에 사용 도중 고장 낸 것일지 모르니 수리비용을 줄 수가 없다고 했다. 수도꼭지는 마트에서 사서 갈아 끼우는 데 몇만 원 안 들고 가스레인지도 두 개 중에 하나만 사용하면 돼 불편해도 참기로 했다.
살면서 불편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단열 문제 때문인지 바깥벽과 연결되는 쪽에 곰팡이가 심하게 슬었다. 대체로 비싼 물건은 없었기에 아깝게 생각되진 않았지만 선물 받아서 몇 번 입히지 못한 아기 옷 7벌과 옷장이 아예 못쓰게 된 것을 보상해달라고 청구했다.
대답은 예상한 대로 "해줄 수 없다."였다. 진짜로 보상을 기대한 건 아니라도 세입자의 권리를 주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했다.
슬프게도 이것 또한 중도 포기가 돼버렸다. 증거 사진만 촬영해서 보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하자 전문가를 직접 섭외해 단열 문제임을 증명해야 하고 여기에 드는 비용 역시 내 몫이고 무료라더니 조정료가 있고…
나중에는 집주인보다 분쟁조정위원회가 더 싫었다. 지금은 주택임대차보호법이 개정돼 하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세입자에게 보다 유리한 조정 진행이 가능해졌다. 임대차 계약 당사자 중에 세입자가 조정을 청구했을 땐 집주인 의사와 상관없이 자동으로 조정 참여가 된다. 반대로 집주인이 조정을 원해도 세입자가 이를 거부할 수 있다. 집주인의 입장에선 불공평한 법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법은 이와 반대였다. 세입자가 억울할 수밖에 없는 많은 사건들이 있었을 것이다. 시어머니가 우리 나이였을 땐 임대차 계약기간이 3개월이었고 자기 아들이 집주인 아들과 다퉜다는 이유로 3개월을 다 못 채우고 쫓겨났다는 얘기는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계약 만기가 6개월 정도 남았을 때 집주인에게 연락이 와서 전세금을 올리겠다고 했다. 집주인은 주택임대사업자여서 다행히 법정 한도인 5% 인상만 가능했다.
집주인 입장에서 보면 재계약을 하며 임대료를 인상하는 것이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그때 내가 부동산에 대해 무지했고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
심각한 곰팡이 때문에 버린 옷과 옷장은 보상도 못 받았는데 퇴거 절차를 진행하면서는 200만 원이나 물어내야 했다. 퇴거일에 싱크대 상판 변색과 시트지 벗겨짐, 옵션이었던 냉장고 문이 약간 찌그러진 데 대한 수리비를 청구당한 것이다.
앞서 아이들이 낙서해놓은 벽지도 있었는데 이건 도의적으로 우리가 먼저 도배 비용을 보상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기존 벽지 제품이 단종돼 똑같은 것으로 교체가 불가했다. 더 싼 제품이나 비싼 제품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는데 집주인은 무조건 더 비싼 것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사장님, 세입자가 호구로 보이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까지 임대사업 수십 년 하면서 한 번도 남한테 해코지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는데요."
"이건 인터넷만 검색해도 법률 정보가 다 나오는데 객관적으로 생활 하자예요. 세입자 과실이 아니에요. 보증금을 빌미로 협박하는 건 갑질하시는 거예요."
"아니,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세요. 내 건물에 이렇게 흠집 내놓으면 기분 좋은 사람이 있겠어요. 저는 권리를 주장하는 거예요."
"저도 집주인이지만 생활 하자 갖고 세입자한테 수백만 원 뜯어내는 건 상상도 못 해봤는데요."
"그건 그쪽 기준이고요. 각자 다른 거죠."
참고 참던 감정이 폭발해 결국 이삿날에 집주인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 공인중개사가 와서 중재했지만 적정선에 합의된 것이 200만 원이었다. 당일 이사하는 새 집주인과 잔금을 치르기로 한 약속시간이 이미 한참 지난 후였다.
세입자의 권리가 나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집주인과의 관계에선 을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물론 세상엔 이보다 좋은 집주인도 있을 것이고 나쁜 세입자도 많은 것을 안다. 내가 겪은 일이 엄청나게 큰 사건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우리 가족에게 자존심의 상처와 임대인에 대한 나쁜 기억, 그리고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교훈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