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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향 Apr 09. 2021

세입자가 아닌 집주인이 됐다

서울 세입자 일기 (3)

  

쉬는 날엔 메리와 함께 집앞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부모님이 난생처음으로 은행 대출을 받아 도시에 내 집 장만을 한 건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다. 서산 시골 마을의 마당 있는 단독주택에 살다가 충남에선 대도시에 속하는 천안의 신규 분양 아파트로 이사 오게 됐다. 부모님 나이로 마흔 안팎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30대 초반에 바퀴벌레가 나오는 낡은 오피스텔에 살다가 이사를 결심하고 거의 매일 퇴근 후 집을 보러 다녔다. 직장생활을 7년 정도 했을 때니 모아놓은 돈은 없어도 대출받을 능력 정도는 됐다고 판단해 덜컥 매매계약서를 써버리고 말았다.

  금리가 낮을 때여서 주택담보대출 1억 원을 받는 데 한 달 이자가 20만 원을 조금 넘었다. 1억 6000만 원짜리 원룸이었는데, 월세가 한 달 60만 원 수준이었으니 단순 계산만 해도 한 달에 40만 원의 비용을 아낄 수 있는 선택이었다.



  독립해서 경제활동을 하는 30대의 성인이기에 부모님에겐 사전 의논이 아니라 계약 완료 후에 통보를 했다.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겁도 없이 1억 넘는 돈을 대출받을 생각을 했느냐. 빚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느냐. 부동산 계약은 신중해야 하는데 부모님과 먼저 상의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 30대 초반의 나이에 결혼도 안 했는데 왜 매매가 필요하냐 전세면 됐지 등등의 이유였다.



  평생을 학교 사회와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살고 경제 기사보단 정치 뉴스를 읽고 저축과 예금 외엔 재테크를 경험해보지 못한 부모님이 나는 좀 답답하게 느껴졌다.

  우리 세대는 월급을 모아 부동산을 살 수 없고 대출은 자본을 늘리기 위한 수단이며 단 하루를 살아도 내가 살고 싶은 집에서 즐겁게 사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천 번쯤 한 끝에 부모님과의 전쟁이 끝났다.

  부모님은 또 어차피 살 바에 결혼해도 살 수 있는 집이어야지, 원룸은 나중에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그땐 결혼 계획이 없었고 나는 이 집에서 1년 5개월 동안 정말 재밌게 살았다.

  벽에 마음껏 페인트칠을 하고 붙박이 가구를 원하는 위치로 옮기고 틈날 때 예쁜 그림과 사진을 사서 여기저기에 걸었다.

  거의 매일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하고 밤새 놀다가 주말 내내 널브러지기도 했다. 지금은 남편이 된 남자 친구와의 아기자기한 추억도 많은 집이었다.



  집을 꼭 소유해야 한다는 주의는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내 집 마련을 원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비용을 지불하고 사용의 의미로 존재하는 집은 어떤 시절의 추억의 공간이 될 수는 있겠지만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몸과 마음을 쉬게 해 주고 행복한 기억과 슬픔의 위로를 받는 것은 소유한 집이 아니라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재테크의 개념과는 다른 문제다.

  하지만 이 집에서 달랐던 건 아침에 눈을 뜨면 느껴지는 햇살이 좋고 창문을 열면 들어오는 바람과 아이들의 등교 소리도 기분이 좋았던 이유만은 아니었다.

  붙박이장도 못질도 벽 색깔도 온전히 내가 원하는 대로 해놓은 집에서 혼자 있는 날에는 창가에 앉아 재미없는 책을 읽어도, 커피의 향과 맛도 다 평범하지 않게 특별했던 날들이다.



  생각보다 빨리 결혼하게 되면서 집을 팔아야 했지만 선뜻 못한 이유 중에 하나는 집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나중에 집값이 더 오를지도 모른다는 이유보다 훗날 다시 돌아와 살게 될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기대였다. 아이들이 자라서 독립하게 되면 우린 다시 이 집으로 돌아와 옛날의 추억을 즐겁게 얘기하며 살자고 남편과 약속을 했다.

  이렇게 소중했던 집이어서 세입자에겐 아끼던 가구와 그림을 떼 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도 했다.

  세입자의 반려견으로 인해 마루나 방충망이 뜯겨도 수리비를 보내 고치도록 했다. 같은 세입자와 임대차 재계약을 할 때는 월세를 깎아주기도 했다.



  6년 후쯤 경제적인 사정으로 집을 팔 수밖에 없게 됐을 때 친구를 떠나보내는 것 같이 속상했다.

  집은 정말 사람과도 인연이 있는 걸까. 바퀴벌레 오피스텔에 살 때는 회사일도 집안일도 개인적인 문제도 다 안 풀리기만 했는데 새집에선 늘 좋은 일만 있었다.



  내 집을 산 매수인은 인상 좋은 중년 여성이었다. 2013년 12월에 매수계약을 한 집은 2019년 10월에 약 3800만 원이 오른 가격으로 매도할 수 있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끝마치고 작별 인사 전 잠깐 나눈 대화에서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은 그가 나와 동향이고 아빠와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동료라는 것이었다. 이 넓은 서울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다니. 더더구나 아빠의 친구라니!

  내 집이 좋은 사람에게 간 것 같아서 다행이다. 내 집의 주인이어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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