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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향 Apr 24. 2021

2억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집을 구해?

서울 세입자 일기 (5)

  결혼 후 3개월 만에 운 좋게 신혼집을 장만할 수 있었지만 2년을 채 못살고 다시 전세를 구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초반엔 신혼집을 팔겠다고 생각해 매물로 내놓았는데 경기 비역세권인 데다 빌라다 보니 가격을 낮춰도 매도 기미가 안보였다.

  할 수 없이 전세 세입자를 구하고 서울 직장과 가까운 곳에서 전셋집을 찾았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컸다. 전세자금대출을 풀로 받고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도 최대 자금이 1억 원 후반대였다.

  보유 자금에 맞춰서 회사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고 보육 환경이 좋은 방배동의 신축 빌라를 보러 다녔다. 첫째 율이는 두 돌이 안 됐고 둘째를 임신해 만삭이던 때다.



  한 번은 위치나 면적 대비 전세금이 싸다고 생각한 매물이 있었다. 하지만 동네 골목골목에 "불법 건축물 철거하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느낌이 좋지 않았다.

  당시엔 부동산 지식이 부족해 불법 건축물의 개념을 몰랐는데 우리가 처음 본 물건은 신축 빌라의 꼭대기층에 불법 증축한 옥탑방이었다. 중간부터 계단 시공이 잘못돼 천장이 낮고 성인은 정상적으로 오를 수가 없었다. 몸을 45도 정도 눕혀서 난간을 붙잡고 겨우 올라야 했다. 단 2년이라도 이런 집에 산다고 생각하니 우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더 충격적이었던 집은 근린생활시설을 불법 용도변경한 신축 빌라였다. 이 사건은 이후에 내가 부동산 기자로서 관련 문제에 관심을 갖고 지금까지 5년 넘게 취재를 지속하는 계기가 됐다.

  부동산 중개인은 처음부터 이 집이 불법이어서 만약 계약하고 살게 돼도 몇 가지 당부 사항이 있다는 말을 강조했다.

  구청에서 단속 나올 때가 있으니 연락을 받으면 집을 비우거나 불을 끄고 사람이 안 사는 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법이어서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게 돼도 법적 보호를 받을 수가 없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지만 우리는 이 집을 계약할 뻔했다. 가진 돈 안에서 원하는 조건의 전세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직시하던 상태고 무엇보다 남편이 집을 마음에 들어 했다. 정상적인 거래라면 이 가격에 넓고 깨끗한 신축, 어린이집이 바로 앞에 있는 역세권 집을 절대 구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가족을 불행으로부터 구한 건 계약 직전 집주인의 폭언이 결정적이었다. 어렵게 계약을 결정하고 공인중개사와 약속을 정했는데 전세자금대출이 안된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중개인이 집주인과 전화 통화를 하는데 볼륨이 커서 사무실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근생 빌라가 어떻게 전세대출이 돼? 아니 2억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전셋집을 구해? 거지 같네 정말!"



  전화기 너머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어차피 계약은 못하게 됐지만 할 수 있었다고 해도 길바닥에 나앉는 한 몰상식한 집주인과 계약할 만큼 절박하진 않았다.

  중개인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지만 구청에 불법 건축물들을 신고했다. 수차례 민원 신고를 하고 주소와 증거 서류를 보냈다. 그리고 이후 관련 기사를 수십 건도 넘게 취재하고 쓰며 알게 된 실상은 내가 겪은 참담했던 사건보다 훨씬 더 어이없는 수준이었다.



  준공 허가를 내주는 지자체가 불법 건축물에 이행강제금도 부과한다는 것, 그리고 공사비를 아끼려고 불법 건축물을 짓는 사람은 건축주인데, 금전적 피해를 입는 건 선량한 분양자나 세입자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다.

  개인 건축주가 대부분인 소형 공동주택은 법적 감시와 관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분양자 중에는 비교적 값싼 집을 찾아야만 하는 서민 무주택자가 많다. 이들이 건축물대장 등을 이용해 불법에 대한 사실을 확인할 능력이 있다면 좋겠지만 많은 부동산 거래자들이 이행강제금을 통보받은 후에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군가에겐 내 집 마련의 꿈이던 불법 건축물은 이행강제금을 평생 내거나 철거해야만 문제가 해결된다. 세입자는 거주의 사실마저 숨겨야 하는 비인간적인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법 건축물이 계속해서 버젓이 지어지는 건 누구의 잘못일까.

  타인의 삶을 망가뜨려놓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건축주와 불법 건물의 준공 승인을 하고 다시 벌금을 내라고 하는 모순적인 지자체 공무원 조직 둘 다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사회의 변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정치권에서 관심을 갖고 불법 건축물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며 지자체의 단속이 강화됐고 분양자에 대한 구제방안 등도 나오고 있다. 누군가는 살면서 한 번도 겪기 힘든 일이겠지만 피해자가 내 이웃일 수도, 가족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때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에 가까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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