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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메리 Oct 12. 2023

길에서 만난 인연들

 2011. 5. 25.


  회사에 연차를 내고 7박 8일 간사이 여행을 갔다. 첫 일본 여행으로 간사이 지방을 선택한 것은 일본어를 공부한다고 했을 때 누군가가 선물해 준 『enjoy오사카』라는 책이 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처음 가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 때 일본 시마네현의 어느 대학과 교류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신청한 사람 10명 정도 함께 가서 각자 배정된 일본 가정집에서 9박 10일간 홈스테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에 혼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27살에 비행기를 처음 타는 촌년이었다. 어쨌든 당시 우리나라 유일한 저가항공사인 에어부산을 타고 1시간 반 정도의 거리에도 나오는 기내식 사진을 찍고 구름 사진을 찍고 하다 보니 금방 간사이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간사이공항은 김해공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지나가는 회사원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 두 명에게 길을 물었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일본어에, 그런 나의 어설픈 일본어를 알아듣는 둘을 신기해하며 그 둘이 알려 주는 대로 전철 표를 끊었다. 그녀들은 내가 불안해 보였는지 옆에서 ‘도우시요(どうしよう, 어떡해)’, ‘다이죠부까나(大丈夫かな, 괜찮으려나)’라며 오히려 그녀들 덕에 긴장이 조금 풀린 나보다 더 나를 걱정했다.

  어쨌든 무사히 전철을 타고 지하철로 환승도 하고 지상까지 올라왔다. 게스트하우스 홈페이지에서 프린트해 온 약도를 보고 걸어서 찾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길치라서 종이 약도만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또 지나가는 동네 할머니께 길을 물어서 찾아갔다.


게스트하우스 유엔




  게스트하우스 유엔에 도착해서 스텝에게 2층에 있는 다다미방으로 안내받았다. 2인실인데 방 중간에 대나무로 된 발을 늘어뜨려서 각자의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돼있었다. 그 방에서 지내고 있는 사람은 일본인 장기 투숙객인데 아직 퇴근을 안 해서 방에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짐을 대충 풀러 놓고 디카를 들고 나와 온통 나무로 되어 있고 여기저기 귀여운 소품들이 배치된 유엔을 정신없이 찍었다. 그러다가 방에 돌아와서 쉬고 있는데 한 사람이 방으로 들어왔다. 스텝이 얘기했던 사람이었다.

  예쁘장하고 귀엽게 생긴 친구였는데 이름은 아오이였다. 아오이가 먼저 나이를 물어보기에 나는 27살이라고 했다. 아오이는 24살이라고 했다. 서로 몇 마디 나누면서 금방 친해졌다. 나중에서야 스텝이 얘기해 줘서 일본에서 만 나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오이와 나는 3살 차이가 아니라 1살 차이였다.

  어쨌든 7박 8일의 여행 동안 매일 저녁 그날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스텝들, 퇴근하고 돌아온 아오이와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스텝들의 추천으로 내가 계획했던 여행 일정을 변경하고 다른 곳에 가기도 했다. 여행 마지막 날 저녁에는 “○○, 페이스부쿠스루?”라는 아오이의 질문에 페이스북이 뭔지 처음 알게 됐고 아오이와 친구를 맺었다.




2011. 5. 30.


  스카이빌딩에 가려고 하는데 지도를 봐도 길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요도바시카메라 건물 앞에 서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스미마센 코코마데 도우얏떼이키마스까?"(죄송하지만 여기까지 어떻게 가나요?, すみません. ここまでどうやって行きますか.)


  그는 대뜸 내 손에 들린 지도를 가져가서 잠시 보더니 자신도 잘 모르지만 같이 가주겠다고 했다. 나는 자신도 잘 모르지만 같이 가주겠다는 사람과 얼떨결에 같이 걸었다.
  횡단보도 앞에 섰는데 또 대뜸 그가 물었다.

  “이쿠츠데스까?”(몇 살이세요?,いくつですか)

  나는 열심히 한국 나이로는 어쩌고 저쩌고 설명하다가 결론은 일본 나이로 25살이라고 대답했다. 같이 얘기하며 걷다가 길이 헷갈리면 그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길 반복하며 걸었다. 대화를 나누며 그에 대해 알게 된 점은 나와 동갑이고 고베 사람이라는 것, 오사카에 직장이 있어 고베로 퇴근 중이었다는 것,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한 적이 있었고, 일본에 있는, 한국 냉면집에서 일한 적이 있었고, 김연아 선수를 존경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며 오다 보니 어느새 스카이빌딩에 도착했다.
  내가 입구에서 사진을 부탁하니 그는 사진도 찍어주었다. 나도 그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고는 내 디카*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렇게 서로의 사진을 찍어준 뒤 그도 처음 와 본 곳이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겠다고 해서 같이 가게 되었다.

*디지털카메라의 약자.
당시에 나도, 그도 스마트폰이 없었다..

  입장료를 내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루프탑이 나왔다. 야경이 아름다웠지만 5월 저녁 바람이 조금 추웠다. 추운 와중에도 사진을 부탁해서 찍고는 둘이서 빙빙 돌면서 야경을 보다가 건물 내부로 들어왔다.
  에스컬레이터를 찾아 내려가려는데 그 앞에 관광명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애운을 봐주는 기계가 있었다. 사람들 몇 명이서 기계 앞에서 떠들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도 운세를 보지 않겠느냐고 권했지만 사양했다.

  “남자친구가 있나 보네요.”

  난 운세 같은 걸 잘 믿지 않는다고 했다.
  건물에서 나와서 또 한참을 이야기하며 걸었다. 걸어오면서 같이 버스킹 공연도 보았다. 어쩌다 보니 모르는 사람과 목적지 한 곳을 함께 여행하게 되었는데 서툰 일본어로 이렇게 오래 대화를 나눈 것도 처음이었다. 전철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전철을 타고 고베로, 나는 지하철을 타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야 했기에 헤어졌다.
  그가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때 연락처를 물어보지 못해서, 그때 찍었던 사진을 전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이 든다.

  '전화번호 주세요' 한 마디만 하면 됐을텐데 그 땐 왜 그 말을 못 했을까?
  고마웠어요, 고베의 이케맨**!

**이케맨 - 훈남, 미남, 잘생긴 남자라는 뜻의 속어


스카이빌딩에서 본 야경




2011. 5. 31.


  교토(京都)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앞에서 긴카쿠지(銀閣寺)에 가기 위해 지나가던 사람에게 길을 물었는데 같이 가주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긴카쿠지보다 더 좋은 관광지를 소개해 주겠다며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잠깐 길을 물었을 뿐인데 여행안내를 해주는 바람에 하루 종일 같이 다녔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장마철이라 여행 내내 우산을 손에 들고 다녔었는데, 손에 든 우산이 무거우니 자기가 들어주겠다며 자기 가방에 넣고 다녀주었다.

  이 날 난젠지(南禅寺), 헤이안진구(平安神宮), 니시키 시장(錦市場), 기온(祇園) 거리를 함께 돌아다녔다. 그는 돌아다니는 내내 길을 안내해 주고 내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설명해 주고 내 사진도 찍어주었다. 심지어 가는 곳마다 표도 끊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가고 싶다고 하는 곳까지 다 같이 가주었다.


  "손나니 이키타인데스까?"(そんなに行きたいんですか, 그렇게 가고 싶어요?)


  내가 일본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친절하냐고 물으니 그는 일본에 이상한 사람들도 많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다고 하니 내가 운이 좋은 것이라고 했다.

  어느새 해 질 무렵이 되어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라멘(ラーメン) 집이었는데 라멘과 맥주를 시켰다. 꼭 내가 계산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계산도 그가 했다.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다. 전철역에서 악수를 하고 헤어졌는데 또 연락처를 못 물어봤다.

  일본어로 온가에시(恩返し)라는 단어가 있다. 은혜를 갚는다는 뜻인데 큰 신세를 진 경우뿐만 아니라 친구 사이에 사소한 일에도 자주 쓰는 말이다. 난 두 사람에게 신세를 졌는데, 연락처를 물어보지 않았던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온가에시를 할 수 없다는 게, 사진을 전해줄 수 없다는 게 지금까지도 아쉽고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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