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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메리 Oct 12. 2023

다섯 번의 고려미술관

교토에서 마주한 재일교포의 꿈

고려미술관 1

조선의 예쁜 그릇들(朝鮮のかわいいいれものたち)


2011. 5. 28.


  여행 준비를 하면서 간사이쓰루패스이용권을 산 후 할인받을 수 있는 관광지를 보다가 어떤 한자가 눈에 띄었다. ‘高麗(고려)’였다. 우연히 한자가 같을 뿐인 일본의 지명인지, 한국사의 국호인 고려인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재일교포가 지은 미술관 이름이었다. 왠지 흥미로워 보여서 여행 일정에 추가했다.

  고려미술관의 창립자인 재일교포 정조문은 우연히 교토의 골동품 가게 앞을 지나다가 조선의 백자를 발견한 후로 평생 동안 일본에 있는 한국의 문화재들을 수집, 일본에 한국 문화재를 전시한 미술관을 개관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전시품들은 모두 한국 문화재들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조선의 예쁜 그릇들」(朝鮮のかわいいいれものたち展)이라는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교토역에서 버스를 타고 내리면 고려미술관으로 가는 이정표가 정류장 바로 뒤편에 있고 그 이정표를 따라 걸어서 1분 정도 거리라 찾기 쉬웠다. 미술관에 들어서니 작은 정원이 있었는데, 정원에는 이끼가 낀 무인석, 문인석, 탑들이 있었다. 정원을 지나 2층으로 된 아담한 건물로 들어가 표를 끊고 전시회를 보았다. 내부 전시에는 백자, 분청사기, 함, 연적 등이 전시돼 있었다.

  그리고 미술관 한쪽 벽면에는 정조문 이사장의 사진과 함께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정조문 컬렉션에 대하여>


  고려미술관의 창립자 鄭詔文(정조문, 1918-1989) 초대이사장이 수집한 고미술품은 약 1700점입니다. 고려청자, 조선 백자를 비롯하여 회화, 목공예, 기와 청동거울 등 매우 다양하며 모두가 우리나라의 것입니다.

  ‘내 스승은 일본의 고미술상’이라 했듯이 대부분은 고미술상에서 구입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수집품은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낙동강에서 놀던 어린 시절의 고향의 일부입니다.

  1918년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에서 태어난 그는 6살 때 부모와 함께 일본에 건너왔습니다. 이주는 일시적인 것이었으나 부모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 그와 형제들은 조국에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37살 때 어느 고미술상 가게에서 한 백자 항아리와 만났습니다. 그때 그가 본 것은 표면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존재감이었습니다. ‘이조, 조선’이라는 것이 뚜렷하다는 그 사실은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항아리와의 만남으로 마음속에 고향에 대한 애틋함이 빛이 되어 ‘조국이 다시 하나가 되면 이것들과 함께 돌아가자’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정조문 이사장은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3년간밖에 학교생활을 지내지 못했습니다. 그 ‘주옥과 같은 3년간’은 많은 기쁨과 함께 민족적 차별에 의한 고통을 주었습니다. 몇 년 뒤 조국의 역사를 모른 채 자란 자신의 비굴함을 되새겨 아이들이 역사를 배우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여 학교 건설에도 온갖 힘을 기울였습니다.

  ‘재일’하여 어느덧 65년, 얼마 안 되어 생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옴을 깨달은 그는 1988년 10월 25일 모든 재산을 재단법인에 기증하여 고려미술관을 창립하였습니다.

  “모든 나라 사람들이 조국의 문화와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동포들이 조국의 평화통일에 대해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

  생애 마지막 목표의 실현을 지켜본 그는 다음 해 2월 낙동강에서 놀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듯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까지 그리워한 조국에 단 한 번도 돌아가지 못하고 작은 미술관에 꿈을 담은 그의 마음은 그가 모은 미술 공예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전해져 그 고리를 넓히고 있습니다.

  고려미술관은 바로 일본의 흙이 된 정조문 이사장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미술관 2

– 아리미쓰교이치전


2012. 5. 30.


  작년에 다녀온 고려미술관을 다시 방문했다. 「조선고고학의 파이어니어 아리미쓰교이치전 – 내 마음의 고향에 바치다」(朝鮮考古学のパイオニア 有光教一展 - 我が心のふるさとに捧ぐ)라는 제목의 전시 중이었다.

  아리미쓰교이치(有光教一)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유적 조사를 했던 고고학자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들이 해외로 유출됐는데, 그 수량은 214, 208점(2022. 1. 1. 기준)이고 그 중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가 94,341점(44.04%)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는 우리나라 유적들에 고고학자들을 파견해 유적들을 발굴하고 출토 유물들을 일본으로 옮겼다.

  아리미쓰교이치도 일제강점기 고고학자들 중 한 명인데,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양심 있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전시에는 아리미쓰교이치가 고려미술관, 교토대학박물관에 기증한 유물들(주로 경주, 공주 등의 신라, 백제, 통일신라 유물들)과 발굴조사 사진, 일지, 조사보고서 등이 전시돼 있었고, ‘한국 고고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김원룡 박사와 주고받은 편지도 전시되어 있었다.



  아리미쓰교이치有光敎一(전 고려미술관 연구소 소장, 1907-2011)는 교토제국대학(현 교토대학) 문학부 사학과에서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를 사사해 고고학을 전공했다. 1931년에 학교를 졸업한 후 같은 해에 발족한 조선고적연구회朝鮮古蹟研究会 최초의 조수로 채용되어 경주에 부임함과 동시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고적조사 사무를 촉탁한다.”라는 사령을 부여받아 조선고적연구에 첫걸음을 내디딘 후, 생애를 조선고고학 연구에 바친 고고학자이다.

  아리미쓰는 경주 황남리 제82호분·제83호분의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1945년 8월의 일본 패전까지 많은 유적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일본패전 후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직원들이 모두 해임되었고, 조선에 살던 일본인의 대부분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아리미쓰는 조선주둔 미군정청 문교부 고문으로 잔류의 명을 받아 조선에 잔류한 단 한 사람의 일본인 고고학자로서 한국 최초의 국립박물관(현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한국인들에 의해 최초로 발굴된 경주 호우총, 은령총의 고적발굴조사 등에 협력하였고, 조사가 끝난 후 1946년 6월에 하카타博多 항으로 돌아왔다.


중략


  그러나 이 와중에도 아리미쓰가 무엇보다도 염려하고 있었던 것은 식민지 조선에서 발굴조사에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보고인채로 남아있던 유적의 보고서 간행이었다.

  “이상의 제 항목(필자의 추측으로는 조선에서 임했던 미보고 유적) 모두를 출판물로서 학계에 공표하지 못한다면 내 전후처리는 완료되지 않은 것이다. 건강을 유지하고 정신을 다잡아, 다른 잡무에 발목을 잡히지 않고 이 계획의 달성에 전념할 것을 굳게 다짐한다.(1978년 2월 17일 씀)”

  이 문장은 아리미쓰가 70세가 넘었을 시기에 작성한 원고의 일부분인데 그가 남긴 많은 자료 중의 어느 전단 원고용지에서 떨어져 나와 덩그러니 한 장으로만 남아 있던 것이다. 고고학자로서 “발굴을 하고서도 발굴보고서를 내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어떻게 하든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연구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던 아리미쓰는 그 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모든 일을 끝내 그의 전후처리를 완료하였다.

  본 특별전은 아리미쓰 교이치의 인물상을 소개함과 동시에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의 고적 조사사업이란 무엇이었는가를 다시 한번 되짚어보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오늘날 아직까지도 식민지주의 심성이 남아있는 일본의 고고학계, 이와 같은 것을 완전히 불식시키지 않고서는 한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과의 진정한 우호는 확립되지 못할 것이며 일본고고학계의 전후처리는 완료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아리미쓰 교이치의 전후처리가 완료되었다고 하더라도-.


후지이 카즈오 藤井和夫(본 전시 감수, 한국 중부고고학연구소 객원연구원)


중략


  아리미쓰는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조선고적연구회(朝鮮古蹟研究会) 조수로 경주에서 근무하는 동안 개인적으로 경주 각지의 유적을 방문했다. 당시 그가 채집하거나 구입한 유물의 일부는 교토제국대학(京都帝国大学) 고고학연구실에 기증되어 현재 교토대학 종합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중략


  아리미쓰와 고려미술관 창립자 정조문(1918-1989)의 인연은 1972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정조문은 일본 땅에 숨겨진 조선 관련 유적, 유물을 찾아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현 고려미술관 관장), 김달수(金達壽 소설가), 시바 료오타로(司馬遼太郎 역사소설가), 하야시야 타쓰사부로(林屋辰三郞 역사학자, 전 고려미술관 관장) 등 많은 인물과 교류하였으며 고대 조선과 일본의 연관성을 주제로 좌담회를 열어 그 내용을 자신이 펴낸 계간지 「일본 속의 조선 문화」(1969-1981, 제50호로 휴관)에 실었다. 1972년 나라현 다카마쓰즈카고분(高松塜古墳)이 발견되어 고구려벽화고분과의 비교 검토를 한 아리미쓰의 논문이 제14호에 게재되었다.

  미술관 설립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정조문의 모습을 본 아리미쓰는 1988년 고려미술관 개관과 동시에 조선총독부와 조선고적연구회 간행본을 비롯한 약 1만 권의 서적을 재단에 기증하였다.

  아리미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장품은 정조문 초대 이사장이 1950년대부터 40년을 걸쳐 수집한 유물 약 1,700점이다. 조선이 일본제국 지배하에 있었던 시기에 구입 또는 약탈되어 일본으로 유입한 것을 떠낸 정조문 이사장의 망향의 열의가 그리워진다.”(「소장품에 대하여」『고려미술관 소장품 도록』 2003)

  아리미쓰는 정조문이 수집한 조선(한국)문화재를 실견한 바 없었으며 고려미술관 개관 후 마제석검이나 청동거울 등의 고고유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경탄하였다. 또한 고려미술관 소장품 중에는 아리미쓰와 인연이 깊은 인물들과 관련한 것이 포함되어 있어 조선 문화를 곁에 둔 사람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국외소재문화재재단,

http://www.overseaschf.or.kr/front/main/main.do?SITE_ID=KOR

- 特別展 「朝鮮考古学のパイオニア 有光教一展 - 我が心のふるさとに捧ぐ」 展示パンフレット(특별전 「조선고고학의 파이어니어 아리미쓰교이치전 – 내 마음의 고향에 바치다」 전시 팸플릿)




고려미술관 3

 조선통신사와 교토

– 참된 교제로의 길 – 송운대사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2013. 11. 17.


  지난 여행에서 나를 차에 태워 단바망간기념관까지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타케우치상을 만났다. 다행히 주고받았던 연락처로 연락이 닿아 워킹홀리데이비자로 오사카에 온 후 만날 수 있었다. 여름에 만나 금각사를 갔었기 때문에 두 번째 만남이었는데, 이번엔 함께 고려미술관에 갔다. 여행 때마다 혼자 왔던 고려미술관이었는데 누군가와 함께 오는 건 처음이었다. 마침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전시를 하고 있었다.


  송운대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을 모아 승병으로 활약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포로 반환을 위해 일본에 방문한 것을 계기로 통신사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조선통신사는 1618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 년간 12회 일본을 방문했다. 매 회 450명에서 500명 정도의 사절단이 반년에서 1년 가까이 에도까지 왕래했다.

  일행은 한성을 나와 부산부터 대마도를 거쳐 에도 내의 항구에 다다랐는데, 동해도를 지나가 큰 환영을 받으며 교류가 펼쳐졌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8회(1711년)와 9회(1719년) 외교문서를 번역하고 응접 하는 직무를 맡았다.


  조선통신사 행렬도와 함께 당시에 전해졌던 그림, 한시 등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죽 둘러보았다. 그중에서 내가 인상 깊게 본 그림은 ‘信’(믿을 신) 자를 그린 문자도(文字圖)였다.    


 

  다음 날 회사에 고려미술관 팸플릿을 가져가서 소개했다. 일본 회사에 다니면서 좋은 문화라고 느꼈던 것은 가까운 곳의 여행일지라도 주말에 다녀오면 오미야게(御土産)를 사 와서 함께 나눠먹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문화재 발굴회사라서 그런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다녀왔을 때 팸플릿을 가져와서 소개해 주는 것이었다. 당시의 나는 고려미술관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팸플릿을 가져가서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던 것 같다.




고려미술관 4

– 한국자수박물관의 컬렉션 – 보자기와 주머니전 – 한 땀 한 땀에 마음을 담아 복을 드립니다.

     

2014. 2. 9.


  회사의 오카가키상이랑 교토 여행을 하기로 했다. 나의 권유로 같이 고려미술관에 갔다. 고려미술관 2층에는 나전칠기 공예품과 소반 등이 마치 방 안에 있는 것처럼 배치되어 전시 중이었다. 조용히 둘러보던 중에 오카가키상이 내게 한국의 전통적인 집 구조의 모습이냐고 물어왔다. 나도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해 다 아는 것은 아니기에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는데, 전시를 둘러보던 오카가키상이 말했다.


  “뭔가 대단히 감동적인데요.”




고려미술관 5

– 고려청자, 조선 백자

     

2014. 4. 5.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고려미술관에 갔다. 고려청자, 조선 백자라는 전시를 하고 있었다. 나는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가기 전 유행했던 분청사기를 더 좋아하지만, 청자, 백자를 조용히 감상하고 마당으로 나왔다.

  마침 마당에서는 어떠한 행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여성분이 해금 연주를 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빙 둘러서 구경하고 있었다. 나도 사람들 사이에 서서 해금 연주가 끝날 때까지 지켜봤다. 그리고 미술관 마당의 나무에 핀 꽃들과 돋아난 새싹들 사진을 찍으며 둘러보다가 나왔다.

  버스를 탔는데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미술관에서 같이 해금 연주를 지켜보던 아주머니였다. 나도 모르게 아주머니께 말을 걸어 고려미술관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여쭤봤는데, 우연히 근처를 지나다가 알게 되었고 흥미로워서 가끔 방문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고려미술관 주소

〒603-8108 京都市北区紫竹上岸町15番地

TEL 075-491-1192 FAX 075-495-3718


관람시간

오전 10시 ~ 오후 5시


휴관일

-매주 수요일(단 수요일이 경축일인 경우에는 개관하고 다음날 휴관)

-연말연시

-전시 교체 기간



고려미술관 가는 길

- JR京都駅(교토역)에서 市バス9(버스 9번) 승차 → 加茂川中学校前(카모가와 중학교 앞) 하차

- JR二条駅(니조역)에서 市バス46(버스 46번) 승차 → 加茂川中学校前(카모가와 중학교 앞) 하차

- 阪急河原町駅(한큐 카와라마치역)에서 市バス37(버스 37번) 승차

  → 加茂川中学校前(카모가와 중학교 앞) 하차

- 市営地下鉄烏丸線北大路駅(시영지하철 카라스마선 키타오지역)에서 市バス37(버스 37번) 승차

  → 加茂川中学校前(카모가와 중학교 앞) 하차

- 京阪三条駅(게이한 산조역)에서 市バス37(버스 37번) 승차

  → 加茂川中学校前(카모가와 중학교 앞) 하차

- 京阪出町柳駅(게이한 데마치야나기역)에서 京都バス34,35(버스 34, 35번) 승차

  → 加茂川中学校前(카모가와 중학교 앞) 하차

- 市営地下鉄烏丸線北大路駅(시영지하철 카라스마선 키타오지역), 北山駅(기타야마역)에서 徒步20分(도보 20분)

URL : http://www.koryomuseum.or.jp/

E-mail : home@koryomuseum.or.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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