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홍수는 간밤에 마신 술이 과했는지 머리를 움켜쥐며 잠에서 깨어났다. 술집에서 숙희와 함께 나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후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렴풋이 자신이 비를 맞으며 숙희를 쫓아갔던 기억, 자신의 뒤를 누군가가 쫓아온 기억이 있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숙희 고년...’
주전자에 담긴 물을 잔에 따르지 않고 벌컥벌컥 마셨다. 물이 목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목이 탔는지 한참이나 물을 마신 후에 이홍수는 이부자리를 둘러보니 이불에 피가 묻어 있었다.
이홍수는 깜짝 놀라 엉망으로 벗어둔 자신의 옷을 살펴봤다. 옷은 비에 맞고 넘어지면서 더럽혀져 있었고 소매 끝에 빨갛게 피가 묻어 있었다.
세수라도 하려고 일어서니 다리가 아팠다. 평소에 달릴 일이 없었던 그는 어제 뛴 것은 맞는지 다리에 근육이 뭉쳐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었다.
“아이고 모르겠다.”
이홍수는 도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모든 사건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숙희가 관련되어 있다.’ 켄타는 새로 산 담뱃값을 뜯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왜 이제껏 남자가 범인이라고 생각을 했을까.’ 켄타는 천천히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길을 걸었다.
처음에 죽은 두 사람에 대해서는 큰 정보가 없었다. 어떻게 이 마을로 오게 되었는지 그전에 어디서 뭘 하고 살았는지에 대한 정보도 없고 단지 그 사람들이 숙희 집 인근에 살았다는 정도만 파악했다.
세 번째 인력거 김씨는 숙희를 많이 좋아했던 것처럼 보였다. 그는 숙희와 관련된 일에는 지나칠 정도로 흥분을 했고 사람들에게 적개심을 표현하곤 했었다.
네 번째 오타는 여성편력이 심한 사람이었고, 수시로 숙희를 희롱하곤 했었다.
“숙희라...”
켄타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성이 사람을 함부로 죽였을리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 여자가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겠어.”
켄타는 혼자서 중얼거리며 경찰서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성은 하야시에게 켄타의 서류를 넘겨주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숙희는 조금은 안정이 되었는지 더 이상은 울지 않았지만, 뭐에 홀린듯한 눈빛으로 유치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치장 안에 정씨와 박씨는 누워서 여전히 끙끙거리고 있었고. 오로지 최씨만이 숙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숙희는 그 눈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최씨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호성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숙희 곁으로 다가가자 숙희와 수진이 동시에 호성을 바라봤다.
호성을 본 숙희는 눈에 다시 눈물이 가득 차올랐고, 수진은 경찰서의 공기가 여전히 불편한지 다리를 떨고 있었다.
“아침부터 뭔 일이 있는감?” 호성이 수진을 보며 물었다.
“어젯밤에 얘가.. 큰일을 당할 뻔했데요.” 수진이 조용히 대답했다.
“큰일이라니?”
“어제 이홍수란 작자가 얘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데.. 아니아니. 얘가 사람이 죽는 걸 봤데요.”
“사람이??” 호성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느릿느릿 대답하고 숙희를 바라봤다.
숙희는 어제의 일이 기억이 났는지 온몸을 바르르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얘. 네가 말씀드려. 나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말야.” 수진은 울고 있는 숙희를 다그쳤다.
그때 켄타가 경찰서로 들어왔고, 성큼성큼 숙희가 있는 곳으로 왔다.
“아직까지도 용무가 남았나? 왜 아직 울고 있는거야? 울고 싶으면 집에 가서 울어!” 울고 있는 숙희를 보니 괜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누가 그녀를 울게 만들었는지, 왜 아직도 울고만 있는지 켄타는 속이 쓰렸다.
“경부님 사람이 죽었다는데유?” 호성이 켄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사람이 죽다니. 어디서 누가 죽어!”
“고갯길.. 폐가에..” 숙희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누가 죽었단 말이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켄타가 숙희를 노려보며 말했다.
“제.. 제가 어제.. 거기서.. 사람. 상수.. 상수가 죽는 걸 봤어요.”
상수라는 말에 호성과 켄타는 동시에 놀란 눈으로 숙희를 바라봤다.
“상수라니! 이봐 호성! 넌 당장 그 고갯길 폐가에 가서 시신이 있는지 살펴봐! 숙희 넌 잠깐 나하고 이야기를 해야겠다.”
“네! 경부님!” 호성은 짧게 대답하고 경찰서를 나섰다.
숙희는 켄타를 따라 취조실로 들어갔다.
취조실에 들어가니 역겨운 냄새가 확 올라왔다. 사람의 피와 오물냄새가 뒤범벅되어 코를 찔렀다.
켄타는 익숙하게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체 숙희를 바라봤다. 숙희는 어쩔 줄 몰라 쭈뼛거리고 있는데 “이 자리에 앉아.” 하고 켄타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늘 화내는 켄타의 음성에 익숙한 숙희는 그런 켄타가 낯설고 무서웠다. 하지만 켄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편안한 미소까지 지으며 숙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게 물어볼 것이 많았는데 스스로 여기까지 와주니 고맙군.”
“제게 뭘..”
“지금 죽은 사람들이 크거나 작거나 너와 관련이 되어있다. 알고 있겠지?”
“네? 제.. 제가 무슨??” 숙희는 깜짝 놀란다. 최근 사람들이 죽은 일과 자신이 관련이 있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날품을 팔던 두 치는 너희 집 근처에 살았었고, 김씨는 너를 많이 좋아했다. 그리고 오타는 너를 괴롭히던 작자였고.”
“날품을 팔던 사람들은 제대로 본 적도 없어요. 김씨는... 그래요 저를 참 많이 예뻐했죠. 저를 예뻐해 주는 사람을 제가 왜 죽여요?”
숙희는 울음기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머리의 비녀를 만졌다.
“네가 죽였다고 말한 적은 없다. 관련이 있다고 했을 뿐.” 켄타는 숙희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숙희는 이렇게 마주 앉아 켄타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 생각했다. 늘 켄타의 옆자리에 앉아 말없고 무뚝뚝한 사내의 옆모습만 봤을 뿐. 마주 앉아 보는 켄타의 얼굴은 더 차가워 보였고, 가늘게 찢어진 눈매는 마치 숙희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 날카로웠다.
“네... 네..? 그.. 그렇지만 관련이라는 것이.. 그리고 오타상은 그저 그런 손님일뿐였어요. 그 사람한테 나쁜 감정 따윈 없었다구요. 그 정도로 제게 하는 사람들은 많으니까요. 더군다나.. 그 사람은 팁이 후했어요.”
켄타는 숙희의 말을 들으며 천한계집이란 생각을 했다. 팁이라니. 천한계집. 돈이라면 네 몸뚱아리 따윈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단 말인가.
켄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숙희를 바라보다 숙희 머리에 꽂힌 비녀에 눈길을 멈췄다.
“그거 잠깐 빼볼 수 있나?”
“네? 뭐 말씀이신지.”
“네 머리에 꽂힌 그거 말이다.”
“비녀 말씀이세요?”
“그래 그 비녀.”
숙희는 당황스러운 듯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비녀를 빼서 켄타에게 전해줬다.
“아름다운데... 꽤나 뾰족하군.”
숙희는 켄타가 왜 저렇게 비녀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나 김씨가 준 물건인 줄 알고 저렇게 보고 있는 것인지, 김씨에게 물건을 받은 것이 죄가 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항상 이걸 꽂고 다녔지?”
“네. 저는 결혼을 했던 몸이니까요.”
“결혼이라... 언제 결혼을 했었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다. “7.. 아니 8년 전에 했어요.”
“왜 지금은 혼자가 된거지? 그리고 그전에는 어디에 살았었나?”
“그게 왜 중요한 거죠?” 숙희는 눈을 똑바로 뜨고 켄타를 바라봤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남편은 결혼하고 한 달 뒤에 죽었어요. 결혼 후 살던 곳은 대구였지만, 남편도 없는 마당에 의지할 곳도 없고 해서 이 마을로 오게 되었어요.”
“남편은 어떻게 죽었고 왜 하필 이 마을에 오게 된거지?”
“남편은... 사고였어요. 일을 하다가 발을 헛디뎌 높은 곳에서 떨어졌죠. 이 마을에 오게 된 건 친척 중 한 분이 수진언니를 찾아가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밥은 먹고살 수 있다고. 그래서 오게 된 거죠. 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으니까.”
“과부라... 다시 혼인을 하면 되지 않은가?”
“하하하핫. 경부님 아직도 조선을 너무 모르시네요. 하하하하.” 아까 그렇게 울던 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숙희는 당당했다.
“이제 눈물은 다 마른 거 같군. 그럼 어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해 봐.”
숙희는 어제 이홍수와 있었던 일, 상수가 죽임을 당한 일들을 켄타에게 설명했다.
“그 이홍수란 자는 살아있나?”
“그거야 저도 모르죠. 죽었는지 살았는지.” 숙희는 그 자의 생사 따윈 관심도 없다는 듯 툭 내던졌다.
“어제 살인현장을 목격했으니 범인도 보았겠군.” 켄타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최대한 집중하여 천천히 생각을 하고 말을 했다.
“너무 어둡고.. 비가 많이 와서..”
“어떻게 사람을 죽였지?”
“그.. 그게..”
켄타는 담배연기를 후 하고 내뿜었다. 담배연기가 공중에서 숙희 얼굴을 가리다가 공중에서 부서져 숙희 얼굴이 다시 드러날 때 켄타는 숙희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아는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