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수진은 다방에 숙희가 나오지 않자 마음이 불안해졌다.
“아니 얘가 시간이 이렇게나 됐는데 왜 안오는거야!” 숙희를 보기 위해 손님들이 하나 둘 몰려들고 제각각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다방 안은 시끌벅적했다.
“이봐 마담! 숙희는 어디 갔어?”
사람들이 저마다 숙희를 찾고, 수진은 볼 일이 있어 조금 늦어질뿐 곧 올거라고 손님들을 안심시켰다.
숙희가 다방에 일하면서 수진은 숙희를 보러오는 손님들 덕에 큰돈을 벌 수 있게 되었지만, 언젠가부터 자신이 숙희를 오히려 모시는 처지가 된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돈을 버는 것은 좋았지만 변덕스런 숙희의 성격을 받아주고, 진상손님을 처리하거나 숙희의 온갖 짜증을 받아주는 일등은 수진의 몫이었다.
“설거지는 거기까지 하고 홀 손님 좀 살피고 있어! 금방 돌아올테니까!” 수진은 설거지를 하고있던 옥경에게 짜증을 내고는 다방 밖으로 나섰다. 숙희가 오기전까지 홀 손님을 받는 일은 옥경의 몫이었다. 숙희에 비해 덩치가 크고 여성스럽지 못한 옥경은 손님들의 구박을 받기 일쑤였고, 그런 옥경이 딱했던지 수진은 되도록 설거지나 차를 만드는 주방 일만 할수있게 배려해주었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퍼부어대던 비는 그치고 다시 햇볕이 내리쬐었다. 수진은 극장앞으로 가 인력거에 오르며 숙희네 마을로 가달라고 했다. 인력거를 타고 가며 수진은 인력거꾼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최씨는 어떻게 됐어요? 나왔어요? 어제 경찰서에 갔다던데.”
“아직은 안나왔는데, 곧 나오겠죠. 지은 죄가 없으니.”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인력거꾼은 최씨의 사촌동생이었다.
“그래도 요즘 분위기가 너무 안좋아서 말예요. 별일은 없겠죠? 그나저나 최씨는 좋겠다. 경쟁자가 둘이나 없어져서 돈은 혼자 다 벌겠네. 호호호호. 언제 시원한 차라도 한 잔 하러 와요.” 수진은 간드러지게 웃으며 최씨에게 말했다.
최씨는 아무 대꾸없이 열심히 발을 놀려 인력거를 끌었다.
극장가 큰 길을 둘러 숙희의 집에 도착한 수진은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살지 않는 집이라는걸 말하기라도 하듯 문이며, 기둥이며 곳곳에 낡고, 다듬어지지 않은 곳들이 보였다.
“숙희야.” 수진은 방문 밖에서 숙희를 불러봤다.
“숙희야 어디 아프니?” 수진은 방문을 열고 깜짝 놀랐다.
대꾸가 없어 자고 있을줄 알았던 숙희는 단정하게 쪽진머리를 하고 방구석에서 초점없는 눈동자로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언니....” 숙희는 수진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수진은 숙희의 뺨에 나있는 상처를 보고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생긴거라고 느꼈다.
“수..숙희야 얼굴은 왜 이런거니” 수진은 숙희에게 다가가 숙희의 한 손으로 숙희의 손을 꼭잡고 얼굴을 매만졌다.
“언니... 흐흐흑..” 숙희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그저 흐느낄 뿐. 수진은 조용히 숙희를 안아 다독였다.
“괜찮다. 괜찮아 숙희야.”
“언니. 나 그 놈을 봤어요.” 숙희는 수진의 품에 고개를 묻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놈이라니. 어떤 놈 말이냐. 너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거니?”
“어제 다방 문을 닫고 나서는데 비가 많이 와서... 우산이 없어서 다방 앞에 서있는데 이홍수가 왔어요.”
“이홍수라면 그 부잣집 도련님 말이냐?”
“네...”
“그자가 네게 몹쓸짓이라도 한거야?”
“네.. 그자가 제게 몹쓸짓을 하려고 했죠. 어제 같이 술을 마시고는 갑자기 사람이 변해서는..”
“그래서 얼굴이 이모양이 된거고?”
“네.. 도망치려고 하다가.”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된거야?”
“그 사람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다니? 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고갯길로 도망을 치다가, 잡힐거 같아 폐가로 몸을 숨겼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상수가.. 흐흐흑”
“얘 똑바로 말을 해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폐가로 갔는데 상수는 또 뭐야?”
“소학교에서 애들 가르치는 상수 있잖아요. 가끔 다방에 들러 차 마시는.”
“아~ 그 김노인댁 양자.. 김선생?”
“네..”
“그 아이가 어찌 되었단게야? 이홍수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김선생 이야기가 왜 나오는거야?”
“무슨 일인지 상수가 손에 화살을 쥔 채 이홍수 뒤를 쫓고 있었어요. 이홍수는 폐가를 지나 이 마을 쪽으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제가 감나무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는데.. 상수가.. 상수가 그자에게서 끌려왔어요.”
“그자라니! 도대체 무슨말을 하는거야?”
“상수가 죽었다고요!” 숙희는 눈물을 흘리며 수진에게 말했다.
“김선생이 죽다니? 누가 김선생을 죽였단 말이냐?” 숙희의 말을 들으며 수진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자는 바로... 언니 이럴게 아니라 우리 경찰서에 갑시다. 나 혼자서는 집밖으로 나가기가 너무 무서워서.. 언니가 같이 가주세요.”
“그래 알았다. 너 걸을수는 있겠니? 이럴줄 알았으면 최씨를 조금 기다리라고 할 것을.”
“최씨라니요?” 숙희는 깜짝 놀란 얼굴로 수진을 바라봤다.
“얘가 왜 놀라고 그러니? 우리 다방에 오던 최씨말고 그 사촌동생 말야.”
“아.. 네.. 언니 걸어서라도 가요 우리. 큰길로 돌아가요.” 숙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며 다시 쪽진머리를 다듬고 김씨가 사준 화려한 비녀를 머리에 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