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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숙희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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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드레신 Sep 09. 2024

비 오는 밤

17.

이홍수는 가기 싫다는 숙희를 데리고 술집으로 들어섰다. 이미 만취한 그의 혀는 술을 한 잔 두 잔 더 마시며 심하게 꼬부라졌고, 숙희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비 오는 창밖만 바라보았다.

‘참 오랜만에 비가 오는구나.’ 숙희는 내리는 비를 보며 호성을 생각했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유난히 더위를 싫어하고 땀을 많이 흘리던 호성. 느릿한 말투로 “비라도 오면 좋겠구먼.”하며 땀을 쓱 닦아내던 그 모습이 숙희의 눈엔 그렇게 멋져 보였다.

몇 번인가 숙희가 은근히 호성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친 적이 있었는데, 호성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숙희에 대한 태도가 변함이 없었다.

그런 호성이 가끔 밉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늘 한결같은 모습에 남자로서 매력을 더 느끼고 있었다.


“이봐 숙희. 이제 그런 다방일 따위는 집어치우고 나랑 혼인을 하자고. 그러면 그 늙은 것들의 수작질도 안 받고 좋지 않겠나.” 잔뜩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이홍수가 중얼거렸다.

“이선생님 많이 취하신 거 같아요. 우리 이제 집에 가요. 사모님이 기다리세요.”

“숙희.. 나랑 혼인을... 나한테 시집만 오면 말야.. ” 이홍수는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잔에 채운 술을 또 들이켰다.

“이미 혼인을 해 아들도 둘이나 있는 양반이 어떻게 혼인을 한다고.” 숙희는 중얼거리며 술로 목을 축였다.


상수는 비 오는 극장가를 터덜터덜 걷다가 술집에 앉아있는 숙희와 이홍수를 발견했다.

당장이라도 술집으로 들어가 숙희의 손목을 잡고 끌고 나오고 싶었지만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이선생님 이제 그만 우리 집으로 가요.” 숙희는 술에 취해 잠들어버린 이홍수를 깨웠다.

이홍수는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비틀거리며 숙희를 따라나섰다. 

“선생님 저는 먼저 가볼게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숙희는 술집 문 앞에서 이홍수에게 인사를 건네고 우산을 폈다. 


그 순간 이홍수가 거칠게 숙희의 손목을 잡고 극장 모퉁이 길 쪽으로 숙희를 데리고 갔다. 숙희는 너무 놀라 발을 헛디디며 길에 넘어졌고, 이홍수는 그런 숙희를 넘어진 채로 어둠 속으로 질질 끌고 갔다.

쏟아지는 비에 이홍수와 숙희는 온몸이 다 젖었고, 비에 젖어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숙희를 바라보는 이홍수의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선생님 이 손 좀 놓으세요! 아프단 말이에요!” 숙희는 넘어진 채 이홍수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숙희 이대로 집으로 가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아? 흐흐흐 아직 우리 할 이야기도 많이 남았는데 말야.” 이홍수는 바닥에 넘어진 숙희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이러지 마세요!” 

숙희는 이홍수의 귀를 물고 있는 힘을 다해 이홍수를 세차게 떠밀었다. 

“이년이!” 이홍수는 넘어졌다가 일어서며 숙희의 따귀를 때렸다.

숙희는 볼을 감싼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조금 전만 해도 취해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던 사람이 어떻게..’ 술에 취한 것인지 욕정에 취한 것인지 이홍수는 미친 사람 같았다. 숙희는 어떻게든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고갯길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하” 이홍수는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숙희를 쫓았다. 초저녁부터 마신 술기운에 생각처럼 빨리 달릴 수 없었던 것도 있지만 이미 숙희의 집이 어디인지 파악해 두었기 때문에 느긋하게 숙희의 뒤를 따라갔다.

숙희는 큰길로 다니라는 호성의 말을 떠올릴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고갯길을 향해 달렸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에 앞은 잘 보이지도 않고, 높은 계단길마저 미끄러워 빨리 갈 수가 없었다. 숙희는 달아나는 중간 뒤를 돌아보며 이홍수가 쫓아오는지 지켜보다가 오타가 죽어 있던 폐가로 들어가 큰 감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최근 두 명이나 죽어 있던 장소여서 그런지 비를 맞아 그런지 한여름인데도 숙희는 한기가 느껴졌다.

이홍수가 어서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고갯길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데, 이홍수 뒤를 누군가가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쫓아왔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잡고 숙희는 그들을 지켜보는데 내리는 비 때문에 이홍수 뒤에 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숙희가 숨어있던 폐가 앞까지 이홍수가 왔을 때, 숙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상수! 저 아이가 왜!’ 

상수는 보자기에서 꺼낸 날이 퍼런 화살을 들고 이홍수 뒤를 따라갔다.

‘저 아이가 도대체 왜 저걸 들고 저 사람 뒤를 쫓는거지.’ 비 맞은 몸이 춥기도 했거니와, 살의에 가득 찬 눈빛을 하고 화살을 손에 꽉 쥔 채 이홍수를 쫓는 상수의 모습을 보니 더욱 심하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담장 밖을 보지 못하고 숙희는 나무 뒤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오들오들 떨고만 있었다.


“끼익.”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너무 긴장한 탓인지 웅크린 채 깜빡 잠이 들었던 숙희는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어떤 남자가 사람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끌고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숙희는 혹시나 들킬까 다시 고개를 숙이고 나뭇가지 틈 사이로 남자를 지켜봤다. 깊은 어둠과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그 남자가 누구인지 끌고 온 물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숨죽여 사내가 하는 행동들을 살펴봤다. 사내는 끌고 온 무엇인가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일이 익숙한 듯 가볍게 목과 어깨를 풀었다. 

목을 돌리고 허공에 팔을 몇 번 휘휘 돌린 후 어느 정도 몸이 풀렸는지 사내는 물체 앞에 쪼그리고 앉아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한참동안 바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내는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다시 품에 넣고 바닥에 있는 물체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무엇인가를 맞추고 있는 듯했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 물체가 놓였는지 사내는 다시 물체 앞에 쪼그리고 앉아 품에서 다시 물건을 꺼내 팔을 하늘 위로 번쩍 들더니 바닥에 있는 물체를 향해 힘껏 내리꽂았다. 그 순간 무엇인가 사내의 얼굴에 튀었는지 사내는 얼굴에 묻은 것을 닦으며 고개를 돌리는데 숙희는 그 사내의 눈빛을 보았다.


‘저... 저 눈빛은..!!!’ 숙희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며 눈물만 흘렸다. 어두워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사내 아래 있는 물체는 사람 같아 보였고, 사내는 얼굴에 묻은 무엇인가를 닦으며 분명히 웃고 있었다.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본 숙희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사내는 숙희의 모습을 못 보았는지 자신의 행위에 집중했다. 바닥에 있는 물체에 꽂힌 도구를 빼내고, 물체를 기둥에 앉힌 뒤 한참을 빤히 바라봤다. 기분이 좋은지 사내는 히죽거리며 앞에 있는 물체에 뭐라고 중얼거렸다. 

한참동안 기둥 앞에 앉혀진 물체에게 이야기를 하고 나서 사내는 바닥에 있던 돌을 주워 들고 물체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손을 움직이다가 격렬하게 손을 휘둘러 물체가 바닥에 쓰러지자 사내는 일어서서 집 밖으로 나갔다.


숙희는 남자가 나가고 한 참 시간이 흐른 후 정신이 들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이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잘 분간되지 않았다. 여전히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꿈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조심조심 마당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제발 자신이 생각한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 바램을 무시하듯 마당엔 참혹하게 죽은 시체가 있었다. 숙희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소리를 삼켰다. 죽은 자가 누구인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참혹하게 죽은 상수의 시신이 있었다. 마치 무슨 할 말이라도 있다는 듯 뜬 눈은 숙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숙희는 상수의 눈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쪼그리고 앉아 상수의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손을 펴 상수의 눈을 감겨주려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경찰서로 가서 알려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폐가 문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자체가 숙희에겐 공포였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지만 누군가가 서있지는 않을까. 숙희는 조심스럽게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에 맞아 산발이 된 머리와 찢기고 비에 젖은 옷, 길에서 누가 보기라도 하면 영락없는 귀신꼴이었다. 숙희는 혹시나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마음을 졸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젠장맞을 비!” 

숙희는 괜히 하늘에 대고 악을 써본다. 캄캄한 새벽 쏟아지는 빗소리는 숙희의 악을 쓰는 소리조차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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