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호성은 취조실 밖에서 고통에 찬 정씨의 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가끔 호성도 어쩔 수 없이 켄타의 명령에 의해 사람들을 고문할 때도 있었지만, 키무라처럼 고문 자체를 즐기지는 않았다.
또 고문받는 자들 대부분은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던 자들이거나, 죄가 없음에도 죄를 인정해야 하는 사람들이었기에 고문을 하면서도 호성의 마음 한 구석엔 그들에 대한 죄의식 같은 것들이 있었다.
호성은 어디선가 구해온 주먹밥 두 개와 마른 헝겊을 들고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취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고 있는 최씨에게 주먹밥 한 덩이를 건네고, 엉망이 되어 누워있는 박씨 곁으로 가 박씨의 피를 닦아줬다.
죄가 있으나 없으나, 매일 부대끼며 만나던 사람들이다. 호성은 이 순간이 가장 괴로웠다. 면이 많이 없는 사람들을 경찰서에서 만나는 것은 상대적으로 덜한데, 자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이 안에서 당하고 저렇게 누워있는 것을 보면 괜히 스스로가 미안해지기도 했다.
“고.. 고맙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박씨가 말했다.
“뭔 고집을 그렇게 피워서 이렇게까지 당한거람요. 키무라가 그럴 때는 그냥 눈치껏 대충 말하고 몸을 사렸어야지. 계속 모른다고 하니까 이렇게 당한 거 아니유.”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할 수도 없지 않소.”
“그건 글치만서도... 어휴.. 일어나 앉을 수 있겠는감요?” 호성은 누워있는 박씨를 일으켜 세워 벽에 기대어 앉힌다.
“이거라도 좀 들어유.” 호성은 박씨에게도 주먹밥을 건넸다.
“저..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등 뒤에서 최씨가 호성에게 물었다.
“지도 모르쥬. 일단은 정씨가 저러고 있으니께.. 정씨가 나와봐야 알 거 같구먼요.”
“저.. 저는 정말로 아닙니다.” 주먹밥을 받고 한 입 베어 물지도 못한 채 최씨가 흐느꼈다.
“지한테 그런 말 해봐야 아무 소용없구먼요. 지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할 뿐이구먼요. 일단 그거라도 좀 들어유. 다른 사람들이 보면 또 뭐라고 입 댈지 모르니께 사람들 오기 전에 먹는 게 좋을 거구먼요.” 호성은 특유의 느린 말투로 대꾸했다.
박씨는 호성이 준 주먹밥을 베어 물었다. 자신이 왜 여기에 끌려와서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고갯길에 다시 가지만 않았어도...” 박씨는 주먹밥을 베어 물며 중얼거렸다.
호성은 두 사람이 밥을 베어 무는 모습을 보고 몸을 일으킨다. 같이 있어봤자 할 말도 없고, 이 사람들 이야기를 다 들어준다 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경찰서 밖으로 나와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데,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제 좀 살겠구먼.” 호성은 쭈그리고 앉아 흰 연기를 내뿜는다.
다방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는데 밖에 비가 쏟아졌다.
“우산도 안 챙겼는데 어쩌지.” 숙희는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낮에는 그렇게 화창하더니 무슨 비람.”
쏟아지는 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다방 앞에서 투덜거리며 서 있는데, “숙희!” 하고 누가 불렀다.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니 이홍수였다. 어디선가 술을 잔뜩 마셨는지 비틀거리며 걷는 폼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우산을 챙겨 온 모습을 보니 반갑기도 했다.
“어머! 이선생님!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호호호호.” 숙희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이홍수를 맞이했다.
“비가 많이 오길래 숙희가 걱정되기도 하고. 흉흉한 세상 아닌가 하하하. 나 같은 남자가 지켜줘야지 하하하핫.” 술냄새를 풍기며 이홍수가 호기롭게 웃었다.
“이선생님이 저를 그렇게 많이 생각해 주시는지 몰랐어요. 호호호. 그 우산은 저 주시려고 하나 더 구하신 건가요?”
숙희가 싫지 않은 눈빛으로 이홍수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럼. 그럼. 내가 숙희 주려고 하나 샀지. 이 밤에 어디 우산 구할 데가 있는지 찾아보라고. 나니까 이홍수니까 구할 수 있는 거야. 하하하하.”
이홍수는 거들먹거리며 허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숙희에게 말했다.
“우리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할까? 아. 아. 그 김순사놈도 내가 숙희를 만나는 건 괜찮다고 했네. 하하하하하. 그 친구 나를 좋아하나 봐. 하하하하” 연신 기분이 좋은지 이홍수는 비에 옷이 다 젖는지도 모르고 숙희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끌어 당겼다.
“이선생님. 오늘은 비도 오고 술은 다음에 마시기로 해요. 호호 그리고 이미 어디선가 거하게 한 잔 하시고 오신 거 같은데. 다음에. 다음에 마셔요 우리.” 숙희는 오묘한 미소를 띠며 이홍수에게 말한다. 이홍수가 잡은 손은 놓지 않은 채.
그 둘을 모습을 길 건너편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 손에 우산을 꼭 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