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정씨는 더 이상 악을 쓰며 소리칠 기운도 없었다.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고통에 정씨는 정신이 혼미해졌고,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마다 키무라는 찬 물을 뿌려가며 정씨를 깨우곤 했다.
들고 온 바늘통에 있는 바늘을 다 쓰고 나서야 키무라는 정씨에게서 한 발 물러났다.
“경부님 일단은 이 정도로 하고, 잠시 뒤에 새로운 놀이를 시작하면 될 것 같습니다. ”
평소 같았으면 키무라에게 맡겨두고 켄타는 취조실 밖에서 기다렸겠지만, 이 날만큼은 당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들이 가진 눈동자에서 하고자 하는 말, 고통을 느끼면서 몸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진실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수고했네. 이 자와 잠깐 대화를 나눌테니, 키무라 자네도 밖에 가서 목이라도 좀 축이고 와.” 켄타는 키무라에게 말하며 넘어진 의자를 일으켜 세워 자리에 앉았다.
정씨는 취조실 구석에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 반쯤은 누워있는 자세로 켄타를 바라보았다.
“이 봐.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들어. 이미 살인도구로 추정되는 물건이 나왔다. 너는 그걸 이용해서 사람들을 죽였고, 그래서 지금 네가 그 꼴로 그렇게 널부러져 있는거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봤자 고통만 늘어갈 뿐이야.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키무라가 물을 마시고 돌아오게 되면, 너는 지금 느낀 고통의 몇 배 이상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는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될걸? 그러니 이제 네가 한 짓을 사실대로 말하란 말이다. 물론 너의 죄가 밝혀지면 처벌 또한 강하겠지만, 그땐 이렇게 고통스럽게 죽지는 않을테니, 그게 더 낫지 않겠나? 네 가족들도 만날 수 있을테고 말야.”
“저는 진짜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정씨는 겨우겨우 입을 뗐다.
“너의 가게에서 가지고 온 꼬챙이가 범행도구와 일치한다. 칼이 아니라 저 꼬챙이 같은 뾰족한 물건에 찔려서 죽었단 말이다.”
“저 꼬챙이는 정육점에서는 모두 사용하는 아주 흔한 물건입니다. 왜 저 꼬챙이 때문에 제가 범인으로 의심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는 오타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켄타가 소리를 빽 질렀다.
“오타는 죽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을 죽인다 한들 뭐가 바뀌겠습니까. 오타를 죽일 거라면 제 아내도 같이 죽여버렸겠죠.”
“네 놈의 아내를 죽인다. 그렇다면 오타 다음엔 네 아내를 죽일 차례였나 보군. 죽인다는 말이 아주 너의 입에 붙어있구나.”
“아.. 아닙니다. 정말 저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정씨는 흐느껴 울었다.
켄타는 그런 정씨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사람을 죽인 사람이라고 하기엔 순해 보이는 그의 말투와 행동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그렇지만 곧 냉정함을 되찾았다.
“짐승만도 못한 놈에게는 인간의 대우를 해줄 필요가 없지. 어차피 지금은 누군가는 범인이 되어야 하는 싸움이란 말이다. 그 누구라도 말이지.”
켄타는 하야시가 한 말을 떠올리며 다시 키무라를 불렀다.
김상수는 우산을 손에 쥔 채 온몸에 비를 흠뻑 맞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딜 갔다 이제 들어오는 거냐?” 김노인은 방문을 열지 않은 채 김상수에게 물었다.
일찍이 부인을 잃고 자식도 없던 김노인은 부모를 잃고 김노인의 가게 앞에서 동냥하던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키우기 시작했다. 비록 정식 양자로 입적시키진 않았지만 정성스레 아이를 돌본지가 벌써 10년이다.
코 흘리며 동냥하던 아이는 어엿한 청년이 되어, 지금은 소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하지만 그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이는 김노인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김노인은 자신이 낳은 자식이 아니었기에 온전히 상수를 믿지는 못했다.
김상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자신의 방으로 문을 닫고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선 상수는 비에 젖은 옷을 벗고 자리에 누워 숙희를 생각했다.
숙희를 처음 본건 5년 전,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극장 앞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엄마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가고 있을 때, 아마 엄마가 있었다면 저런 모습이었을까. 하며 넋을 잃고 숙희를 쳐다보았다.
그 후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올 때면 지름길로 가지 않고 늘 극장 앞을 지나게 됐고, 혹시나 숙희를 볼 수 있을까 극장 앞에서 무작정 기다린 것도 여러 번. 10대 사춘기 소년이 앓는 사랑의 열병을 상수는 그때 처음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김노인의 집과 가게에 호성의 출입과 감시가 잦아진 것도 그 무렵, 상수는 호성을 통해 숙희가 극장 앞 다방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방 영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일부러 극장 앞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나이가 어려 다방 안에 들어가진 못하고 수없이 그 앞을 돌며 숙희를 만나기라도 하면 인사는커녕 골목 안으로 숨기 바빴던 수줍은 소년.
그런 불꽃같은 마음을 품고 살아온 지도 벌써 5년. 그사이 상수는 어른이 되었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면서 다방에도 출입하게 되었다.
다방에서 본 숙희의 모습은 상수가 그동안 연모하던 아름다운 여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나이가 많건 어리건 숙희는 모든 남자 손님들에게 아름다운 미소로 응대했고, 가끔 숙희의 엉덩이를 두드린다거나 다리를 쓰다듬는 짓궂은 손님들에게도 화를 내기는커녕 요염한 웃음을 보이며 손에 쥐어주는 몇 푼 돈을 받고 좋아하곤 했다.
그런 숙희의 모습을 보며 상수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른이 되면 그 아름다운 여자에게 멋지게 고백을 해야지라는 상수의 생각은 다방 안에서의 숙희를 보며 점점 사라졌고, 마음속에서는 질투와 분노가 조금씩 자라났다.
어떤 특정인을 향한 질투와 분노는 아니었다. 다방에 오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숙희를 좋아했고, 또 그들 중 대부분이 숙희를 보기 위해 다방에 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막상 다방에 앉아 차를 마시다가 숙희가 상수 옆자리로 오면 너무 떨려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숙희는 그런 상수를 막냇동생 보듯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기만 할 뿐 둘 사이엔 아무런 감정의 교감도 없었다.
상수는 옷장에 들어있는 보자기를 꺼내 푼다. 오래된듯한 화살 몇 개가 보자기에 싸여있다. 상수는 그중 화살 하나를 꺼내 들어 정성스레 촉을 닦아주었다.
상수가 김노인의 집에서 살게 되던 날, 김노인은 이 화살들을 상수에게 주었다. 옛날에 나라를 지키던 훌륭한 장군이 쓰던 화살이었다고, 지금은 힘이 들지만, 너도 커서 이런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며 김노인은 상수에게 화살을 선물로 주었다.
상수는 마음이 복잡해질 때마다 화살을 꺼내 정성스럽게 촉을 닦았다. 항상 촉에 광이 날 때쯤이면 상수 마음속의 분노가 조금 가라앉았는데, 오늘따라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홍수 그 개자식이라니!!!!’
상수는 벗어던진 옷들을 다시 입고, 방문을 나선다. 손에는 우산이 아닌 보자기에 싸인 화살을 들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