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이럴줄 알았으면 아까 그 꼬챙이를 챙기는건데. 날씨 한 번 지랄맞게 덥구먼.”
호성은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정육점을 향해 걷는다. 극장을 지나는데 김노인이 호성을 불렀다.
“이보게 김순사!”
“영감님 잘 지내시쥬?”
호성은 김노인을 향해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했다.
“세상이 흉흉해서. 잘 지낼수가 있나. 그나저나 요즘 김순사는 가게에 통 안들르구만. 어제 켄타가 가게에 왔었네.”
“아... 인력거 김씨 사건 때문에 경부님께서 가셨겠쥬.”
“자네는 알고 있었나?”
“저도 어제 처음 듣는 얘기였구먼요.”
“그렇겠지. 자네가 미리 알았더라면...”
“제가 미리 알았어도 별 도리는 없었을구먼요.”
“박동지.. 참 아까운 청년이었네.”
“그 청년이 어떤 청년인지 영감님이 하시는 일이 좋은일인지 나쁜일인지고 저는 잘 모르는구먼요. 글치만 영감님께서 자꾸 그런일에 엮이면 위험하니까.. 이제 그만 하시는게 좋을거 같구먼요. 켄타 경부님도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고 있는거 같으니께.”
“자네는 알면서 왜 나를 가만히 두는건가?”
호성의 마음을 들여다 보기라도 하듯 김노인은 호성을 빤히 바라본다. 그런 김노인의 눈빛에 호성도 부담을 느꼈다.
“저야 뭐...”
“자네도 조선인이라 이건가?”
“제가 조선인이건 일본인이건 그런건 관계없쥬. 저는 그냥 지금이 좋구먼요.”
호성은 자신이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생각을 해봤다. 태어나기는 조선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부터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있었고, 그들의 교육, 그들의 풍습을 더 많이 따르며 컸다. 나이가 들어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 같은 일을 해도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은 심했고, 그래서 지금 순사가 되어 일 하는 것에 호성은 나름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나는 뭐여? 조선인인겨? 일본인인겨?’ 하늘을 바라보며 호성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는가?”
“어제 양복점 오타상이 죽었구먼요. 의심되는 사람 몇을 잡았는데, 경부님이 범행도구를 가져 오라고 하셔서 가지러 가는구먼요. 뭔놈의 날씨가 이래 더운지 사람 잡겠구먼요.”
아까의 주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지 호성은 과장된 몸짓으로 손부채질을 했다.
“양복점 오타상이라 하면 그 기름진 얼굴 한 그 자 말인가?”
“네 맞구먼요.”
“그자가 아주 악질이라는 소문이 나한테까지 들릴 정도니 원한을 가진 사람도 많았겠구만. ”
“안그래도 이번에는 사람들이 다 죽어야 할 놈이 천벌 받아 죽었다함서 좋아하는구먼요.”
“죽어야 할 놈이라...정말 천벌을 내릴수 있는 신이 있다면, 이 나라를 빼앗은 놈들에게 벌을 내리지 않고서... 10년만 젊었더라면...”
김노인은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영감님 당분간은 쥐죽은듯이 계시는게 좋겠구먼요. 여름이 들어서면서 사람도 자꾸 죽어나가고. 경찰서 분위기가 엉망이구먼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호성이 말했다.
“여기서 더 안좋을게 뭐가 있겠나. 더 더워지기 전에 가던 길 마저 가게. 종종 가게에도 들리고, 하루가 멀다하고 오던 자네가 안오니까 뭔가 섭섭하이. 그것도 정인지.. 허허허.”
“네 영감님. 지금 하는 일 끝내면 또 예전처럼 자주 가겠구먼요. 저도 영감님네 가게에 있으면 그냥 기분이 좋구먼요. 무식해서 뭐가 뭔지 모르지만 그냥 예쁜 물건들을 보면 기분이 좋구먼요. 허허” 호성은 다시 김노인을 향해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를 하고 가던 길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꼬챙이를 챙기고 남은 고기 손질을 아랫마을 정육점에 부탁하니 해가 기울었다. 하루종일 걷다보니 시장기가 든 호성은 인력거 김씨와 구두닦이 박씨가 자주 가던 국밥집에 가서 국밥 하나를 시켰다.
저녁때라 그런지 국밥집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살기가 힘들다고 푸념을 하면서도 누군가는 늘 취하고, 취해야만 하는 그런 세상이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국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으려는 찰나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김순사님 아니오!”
이홍수. 일본유학을 다녀와 변변한 직업은 없지만, 대대손손 물려받은 재산에 지역유지 행세를 하는 하야시의 친구.
호성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서서 꾸벅 인사를 했다.
“우리사이에 인사는 무슨. 앉으시오 앉으시오. 요즘 많이 바쁘단 얘기는 들었소.”
“네. 요새 좀 많이 바쁘구먼요.” 호성은 건성건성 대답을 했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 신경쓰지 말고 드시오. 이보시오! 여기 국밥 하나랑 막걸리도 한되 주시오!”
“수..술은 안되구만요.”
“괜찮소. 있다가 하야시한테 내가 잘 얘기 해줄테니. 긴히 김순사와 나눌 얘기도 있고. 그나저나 오타상은 누가 그렇게 한거요?” 이홍수는 자신의 잔을 먼저 채우고, 호성의 잔에도 잔을 채웠다.
“아직은 잘 모르겠구먼요. 글치만 켄타 경부님이 금방 범인을 잡을거구먼요.”
“켄타... 그 자는 참 열심히는 하는데. 뭔가 융통성이 없단 말야. 그렇지 않소?”
“저는 그런거는 잘 모르는구먼요. 저는 경부님이 시키는 일만 하는 처진께.”
“김순사는 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욕심이 없소?”
“지까짓게 무슨.. 저는 지금도 만족하면서 살고 있구먼요.”
“하하하. 덩치는 곰같이 커다란 양반이 어찌 꿈이 그리 올챙이마냥 작소! 한잔 시원하게 들이키고 우리 서로에게 좋은 이야기 좀 해봅시다.”
“서로에게 좋은 이야기가 뭐가 있는감요?” 호성은 맛있게 막걸리를 마시고는 손으로 입을 닦았다.
“요 앞 다방에 숙희라고 있지않소. 내 듣기로는 김순사와 친하게 지낸다고 들었는데....” 이홍수는 끈적한 미소를 지으며 호성에게 물었다.
“숙희라 하면 극장 앞 다방의.. 그렇게 가깝게 지내진 않지만 자주 보는 사이긴 하쥬. 사는 집도 제법 가깝고.”
“김순사가 조금만 힘을 써주면 나도 좋고, 김순사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 같은데 말이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구먼요. 알아 들을 수 있게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구먼요.” 호성은 국밥을 입에 한가득 넣고 잘 익은 무김치를 우적우적 씹으며 이홍수에게 대답했다.
“숙희를 밖에서 좀 만나게 해주시오.”
“그건 이선생님이 알아서 할 일이쥬. 제가 도와드릴수 있는게 없구먼요.”
“숙희에게 물어보니 김순사에게 허락을 맡으라던데?”
“지가 뭔데 허락을 해주고 말고를 하는감요. 지가 숙희 서방도 아니고. 선생님께서 알아서 하시면 될거구먼요.” 호성은 그릇째 들고 남은 밥과 국물을 후르륵 마시고 꺼억 트림을 했다.
예의라고는 없는 호성의 행동에 이홍수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웃는 얼굴을 보였다.
“그럼 김순사는 허락한걸로 알겠소.”
“허락은 무슨놈의 허락이당가요. 허허허 오늘 참 이상한 날이구먼요. 저는 서로 언능 가봐야겠구먼요.”
호성은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급하게 자리를 떴다.
‘숙희 고년. 으흐흐흐.’ 이홍수는 기분나쁜 미소를 지으며 잔에 남은 막걸리를 마저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