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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향 Sep 21. 2021

백신, 손절도 당합니다.

병원이 거절도 한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옆지기의 백신 일정이 9월 18일 토요일로 잡혔다.

주변 사람들이 종합병원이라고 말하는 옆지기를 건강한 사람처럼 편하게 생각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지난번 서울대 병원에 정기검진이 있던 날, 담당의와 상담도 하고 기존에 어느 주사에서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던 경험이 있어 백신 부작용 반응 검사까지 했다. 검사에서는 이상이 없다는 소견이 나왔다. 담당의도 백신 접종에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는 소견을 말했다. 그러면서 말로만 했을 경우 다른 병원에서 백신 접종이 안 될 수 있다고 '요양급여 회송서'를 작성해 주셨다.


'회송서'가 있으니 당연히 백신 접종이 가능할 것이었다. 그래서 옆지기는 일주일 전부터 백신을 맞기 위해 남들이 좋다고 하는 뭔가를 꾸준히 준비했다. 비타민과 단백질을 꾸준히 섭취하고, 혹시나 컨디션이 문제가 생길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전장에 나가는 장수의 심정이 저랬을까 싶을 정도로 결연한 의지로 준비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옆지기와 같이 11시 예방접종 시간에 맞춰 동네 병원에 도착했다. 옆지기는 시간이 거의 다 되었기에 먼저 병원으로 갔고, 나는 주차하고 약국에 들러 타이레놀과 이브 프로펜 계열 소염진통제를 사 가지고 병원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줄이 엄청 길었다. 저 앞에 줄 서있는 옆지기가 보여 다가갔더니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었다.

"왜? 뭐 잘못됐어?"

"아니, 내가 분명히 신분증 챙겼는데 없네."

"아까 지갑 열어 꺼내서 확인까지 하던데 왜 없어?"

"그러니까, 분명히 챙겼는데."

"그럼 기다려봐. 내가 집에 갔다 올게."

병원이 걸어서 2분 정도밖에 안 걸리니 내가 갔다 오는 게 빠르겠다 싶어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해서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거실 테이블에 신분증이 예쁘게 잘 놓여있었다. 아무래도 나갈 때 잘 챙겨간다고 테이블에 잘 보이게 놓았던 것이 오히려 일을 만들었나 보다.


신분증을 가지고 병원에 도착하니 얼마 안 있어 차례가 됐다. 옆지기는 '회송서'를 들고 당당하게 상담실로 들어갔다. 회송서도 있는데 당연히 맞을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나오는데 옆지기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상담이 길어지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 순간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옆지기가 상담실 문을 열고 나왔다.

"힝~! 다른 병원으로 가래."

"왜? 회송서 가져왔잖아."

"의사 선생님이 종합병원으로 가서 맞으래."
"왜? 이유는?"

"혹시 부작용 생기면 응급조치가 어려울 수 있다고..."

"그래? 그럼 종합병원으로 가볼래? 아니면 그냥 맞지 말래?"

"그래도 학생들 때문에 맞아야 하지 않을까?"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권역응급의료센터로 갔다. 시간이 걸릴까 싶어 옆지기를 정문에 내려주면서 먼저 접수하라고 하고 주차장으로 갔다. 백신 접수처에 도착하니 텅 비어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봤더니 토요일은 백신 접종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옆지기의 백신 접종은 병원에 손절당하고 말았다. 


옆지기는 기분이 꿀꿀하다고 했다.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들도 백신을 맞으라 강요하는 세상인데 병원에서조차 백신 놓기를 거부당했다고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백신 맞으면 맞지 않은 사람도 효과를 같이 보게 된다며 괜찮다고 위로해 줬지만 기분이 풀리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나온 김에 드라이브 겸 기분전환을 시켜주려고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단골 카페에 가서 아이스커피 두 잔을 시켜서 야외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5시다.


옆지기의 기분도 풀어줄 겸 이벤트성 저녁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홈핑 하자. 당신은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할게."

"아직 준비도 안 했는데 언제 저녁 먹으려고?"

"금방 준비하니까 빨리 가자고."

"응. 그런데 애들도 없는데 우리끼리만 먹기 좀 미안한데..."

"괜찮아. 오랜만에 오붓하게 둘이 기분 좀 내보지 뭐."

"그래도 애들 부를까?"

옆지기는 묻는 동시에 아들한테 전화를 걸고 있다. 둘 다 오랜만에 할머니 집에 갔다고 오기 싫다고 한다. 그래도 옆지기는 아쉬운 것 같다.


한우 전문점에 토마호크를 주문하고 샐러드와 토마토 수프를 사 가지고 집에 왔다. 홈핑 자리에 해먹을 치우고 서둘러 캠핑 분위기를 잡았다. 토마호크에 시즈닝을 하고 숯불을 피워놓고 혹시 모를 모기들의 훼방(?)에 대비하기 위해 모기향까지 피웠다. 그 사이 옆지기는 피곤하다며 준비되면 부르라고 하고는 잠이 들어버렸다.


아무래도 백신 맞을 생각에 긴장을 무척이나 했었나 보다. 정상인 사람들도 부작용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는데 긴장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오늘 백신을 맞지 않게 된 일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숯불에 고기를 올리는데 어느새 옆지기나 나와서 휴대폰을 들이민다.


숯불에 토마호크는 잘 익어만 갔다. 담백하고 풍부한 육즙이 머물고 있는 토마호크와 토마토 수프는 예상보다 더 맛있는 조합이었다. 오랜만에 여유로운 저녁과 이어지는 불멍의 시간, 그리고 커피 한 잔의 여유까지 누리는 기분 좋은 저녁이었다.


병원이라는 곳은 늘 마음에 부담이 된다.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 찾아가기도 하고, 예방하기 위해 찾아가기도 하는 고마운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병원이라는 곳은 가까이하기 싫은 곳이다. 기분 좋게 저녁을 먹고 나서, 잘 먹는 것 만으로 모든 병이 완치되는 세상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다.


밤이 깊어가는 사이 어느새 공기는 제법 쌀쌀해지고 있다. 화로에 타오르는 불꽃이 바람을 따라 흔들리며 시선을 잡아준다. 몸도 덩달아 붓꽃을 잡으려는지 화로를 향해 기울어가고 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그저 함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불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조용히 장작 두어 개를 화로에 집어넣는다. 따뜻함이 한층 더 가까워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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