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향 Apr 04. 2022

화단을 잃어버렸다

주택에 사는 맛

"커피 한 잔 마시러 갈래요?"

토요일, 새벽 시간에 움직이는 분주함에 눈을 뜨자 옆지기가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한다. 이 시간에 문 연 곳이 있냐고 물었더니 설명해준다. 친한 동생이 운영하는 카페가 겨울 동안 쉬다가 오늘부로 다시 오픈한다고 카페 앞에 꾸밀 꽃들을 가지고 가서 식재를 해주기로 했다고 한다. 결국 가서 식재 좀 도와주고 그 대가로 커피 한잔 마시고 오자는 말이었다.


도심에서 벗어난 카페에서 모닝커피 한 잔 마시는 것도 괜찮다 싶어 따라가기로 했다.  아침 공기가 아직 쌀쌀한 것이 완연한 봄은 아닌 듯했다. 카페에 도착하니 작은 미동조차 없는 고요한 아침이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트렁크에 싣고 온 식물 포트를 내렸다. 많은 줄 알고 도와주려고 따라왔었는데 막상 확인해 보니 열개도 안 되는 작은 숫자다.

"이거 심어주고 커피 얻어먹기는 좀 미안한데?"

"친하니까 괜찮아, 그리고 나 그 정도는 얻어먹을만하거든요!"

오랜 시간 함께한 목련을 결국 떠나보냈다. @소향


포트에는 봄꽃들이 이미 활짝 피어 있었다. 카페 입구 화단에 심어져 있는 하얀 꽃들 사이에 옆지기는 요리조리 재가면서 조화가 잘 되는지를 확인하고 싶는다. 꽃을 거의 다 심어가는데 카페 주인은 아직 기척이 없었다. 기다리던 옆지기가 전화를 건다. 잠시 후 부스스한 모습으로 카페 주인이 나왔다. 오늘 장사할 준비를 밤늦게서야 끝내서 지금까지 자고 있었다고 한다.


역시나 세상살이 쉬운 것은 없다. 겉보기에는 그저 커피와 쿠키, 케이크 같은 것만 팔면 되는 줄 알았던 작은 카페조차 장사를 위해서 잠을 줄여가며 준비를 해야 하니 말이다. 카페 주인의 그런 정성이 있으니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장사를 해야 하는데 너무 일찍 찾아와 잠을 깨운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화단을 비우기 위해... 백명자 나무 @소향

커피를 받아 들고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8시부터 한쪽 화단을 정리하기 위해 포클레인의 작업이 예정되어 있다. 화단에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목련나무와 석류나무, 1.5미터 정도의 목수국을 보내야 한다. 나무들은 공사를 하는 사장님이 집으로 가져가기로 했다. 공간이 좁아 일단 작은 포클레인으로 화단의 흙을 퍼내고 나무를 뽑았다. 최대한 흙을 남겨 그곳에 가서도 잘 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제 마당에 큰 나무는 없다. 지금까지 총 다섯 그루의 나무를 정리했다. 가장 먼저 베어버렸던 느티나무, 너무 빨리 성장해서 다른 곳으로 보내버린 무화과나무, 고령으로 열매를 지탱하지 못했던 감나무. 그리고 이번에 보내게 된 석류나무와 목련나무다. 큰 나무가 있을 때는 그늘이 지고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었는데 나무 없는 마당에서 강렬한 태양과 싸워야 할 일들이 걱정이긴 하다. 나무들은 이제 내 손을 떠났고, 나는 그늘을 포기했다.

장미 화분(좌) 튤립화분(우) @소향

서둘러 평탄 작업을 한 후 그곳으로 화분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미적 감각보다는 공간 확보가 더 중요했다. 화단의 식물들을 나눠줄 것은 모두 다 나눠주고 아끼는 아이들만 해도 보관할 장소가 모자랄 것 같았다. 서둘러 테이블을 옮겨놓고 가장 먼저 장미화분을 올려본다. 장미만 해도 테이블 하나로는 어림도 없다. 빈 공간을 최대한 줄이면서 올리는데도 모자란 건 역시 공간이었다. 화분들이 공사를 해야 할 부분까지 계속 침범해 가고 있다. 아직 화단에 식물들도 많은데 말이다.


아깝지만 맥문동과 치자, 수국, 붓들레아, 조팝 등등 처치 곤란한 아이들은 다시 나눔을 시작했다. 가져가는 사람은 싱글벙글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만치 키워놓은 식물들을 시중에서 구입하려면 쾌나 비싸게 달라고 하기 대문일 것이다. 팔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적 여유도, 그럴만한 생각도 없다. 지금은 가장 빨리 정리하고 철거를 한 뒤 공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돈인 세상에서 시간을 끄는 것은 그만큼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한 곳으로 모은 화분들(보이는 것은 일부일 뿐...) @소향

그렇게 이틀이라는 시간을 잠시의 휴식도 없이 마당에서 보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큰 애물단지가 하나 있었다. 매실 항아리가 그 주인공이다. 10년이 넘은 대형 매실 항아리가 공사를 해야 할 공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장모님이 담근 매실 항아리라 버릴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주인에게로 돌려주기로 했다.


3명이 겨우 들어 올려 차에 싣고서 처가로 가서 내려놓았더니 장모님은 매실진액이 10년이 넘었다며 귀한 걸 가져왔다고 좋아하신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울상을 지으신다.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야외수도가 고장이 났는지 물이 안 나와서 애가 탄다며 하소연하신다. 손으로 만저 보니 손잡이가 마모되어 겉돌고 있었다. 응급조치를 해 놓으니 그만 얼굴이 환하게 밝아온다. 별거 아닌 일이지만 당신이 직접 할 수 없으시니 답답하셨던 것이다. 귀찮을까 봐 고장 난 거 고쳐달라고 전화도 못하고 참고 계셨던 모양이다.


어느새 해는 서산 뒤에 하품을 숨기고 있다. 주말이 이리도 빨리 지나갔나 싶다. 주택에 산다는 건 어쩌면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들의 연속이다. 그걸 힘들다고 생각하면 힘든 일이 될 것이고, 재미라 생각한다면 재미로 보아 넘길 수 있는 일들이다. 그런 것이 사는 재미다. 어제저녁 옆집 아저씨와 나누던 말이 문득 생각이 난다.

"주택은 지으면 그때뿐이지만 어떤 사람이 쓰느냐에 따라 몇백 년도 갈 수 있지요."


고택을 보면, 오백 년이 지났다는 건물이 세월의 흔적만 묻어 있을 뿐 여전히 튼튼하게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사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정을 들이고 가꾸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집도 수명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택은 역시 정을 먹고사는 우리 삶의 동반자라는 생각이 든다.


꼭두서니 물드는 저녁 하늘에 철새들이 귀가하는 모습이 어른거린다. 고된 하루 일과를 쉬어갈 집, 잠시 머물다 떠날 지라도 안식의 공간은 필요할 것이다. 그 잠시 머무는 자리라도 오롯이 쉴 수 있는 공간은 내일을 위한 오늘의 최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주택에 사는 맛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mfeou/702

https://brunch.co.kr/@mfeou/699


매거진의 이전글 마당, 행복과 기억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