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이는
“문 기자, 그게 언제적 이야기인데.”
제가 전 직장에서 서울대를 맡아 출입하던 시절, 한 노교수님을 뵙고 식사를 하던 중 당시 최신 트렌드로 통하던 사안을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수님 전공과도 연관 있는 주제라 나름 괜찮은 화젯거리가 되겠다 싶어 꺼냈던 이야기였습니다만. 돌아온 반응은 의외로 심드렁했습니다.
“요즘 유행인데요?”
“그래요? 학계에선 한참 옛날에 지나간 소리인데.”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문제의 그 ‘트렌드’는 학자들도 과거 한때 접해본 바가 아주 없진 않으나, 결국엔 학술 가치를 인정받진 못하고 강단에서 밀려난 그저 그런 이슈 중 하나였다 합니다. 그 정도 위상에 불과했던 이론이 최근 들어 급작스레 부상해 상당한 주목을 받는 데다, 이른바 ‘전문가’까지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세태 자체에 교수님은 오히려 흥미를 보였습니다.
“조금만 공부해 보면 학문 반열에서 취급하기엔 논리가 엄밀하지 못하고 학술적 근거도 부족하다는 것쯤은 파악이 될 텐데. 요즘 학생 수준이면 석사과정 정도만 돼도 다루겠다는 소리를 차마 못 할걸요. 그런 주제로 논문을 쓰는 건 학위 받기 싫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니.”
“그래도 일단 듣기로는 그럴듯하던데요...”
“공부 제대로 한 사람이면 그걸 가지고 그럴듯하게 말하지도 못할걸요? 배운 사람이면 양심이 있지, 스스로 생각하기로도 말이 안 되는 이론을 어떻게 자신 있게 말하겠어. 무식하니 용감한 거지.”
어릴 적 어른들께 간혹 듣던 소리 중, 서울 가 본 사람과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서울 이야기를 하다 언쟁이 붙으면, 결국엔 서울 가 본 쪽이 밀린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지식이나 경험을 쌓은 사람은 자신의 배움이 얼마나 하찮은지를 오히려 깨닫게 되니, 차라리 아예 모르거나 얕게 알아야 단호하고 강경한 태도로 확신에 찬 주장을 펼칠 수 있다는 의미인데요.
이를 뒷받침하는 개념인 ‘더닝-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라는 것도 존재하죠. 코넬 대학교 사회심리학 교수 데이비드 더닝과 대학원생 저스틴 크루거가 자교 학부생을 연구해 제안한 이론으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반면 우수한 인물은 오히려 본인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정도로 대략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대학가에서도 학사가 되면 자신이 전공 분야를 모조리 안다 생각하고, 석사과정을 거치면 내가 모르는 부분이 아직 많다는 사실을 비로소 느끼게 되며, 박사 학위를 따면 내가 아무것도 몰랐음을 깨달으며, 교수 직함까지 손에 넣으면 아는 것 하나 없는 내 말을 남들이 쉽사리 믿으니 불안해진다는 말이 있죠. 아무래도 배움은 등산과 같아 높이 오를수록 가보지 못한 먼발치는 오히려 더욱 많이 보이는 만큼,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스스로의 지식수준에 겸허해지고 자신이 뭔가를 몰라 틀렸을 가능성 또한 보다 폭넓게 고려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무자들은 너무 잘 알아서 차마 손대지 못하는 전략이나 분야를, 리더가 자신 있다며 앞장서 추진하는 상황은 어디서나 그리 드물지 않은데요. 윗선에서 보기엔 새로운 도전이나 혁신을 해보겠다는데 무작정 반대하(는 듯해 보이)는 일선 실무진보다는 적극적이고도 진취적인 자세로 과감히 나서는 리더가 기특하고 믿음직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임원급에선 리더가 암만 미쁘고 갸륵해 보이더라도, 임무와 권한을 하사하기에 앞서 숨을 한 번 고르며 그가 정말 일을 맡길 만한 인물인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더닝-크루거 효과에서 부정적 포지션에 위치하는, 무식해서 용감한 인물일 수도 있거든요. 안되는 이유조차 모를 정도로 지식은 얕지만, 의욕과 자신감만큼은 쓸데없이 충만해, 풍부한 지식과 경험에 기대 리스크와 비효율을 잘 피해오던 실무자들까지 함께 지뢰밭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전문가를 ‘자처’하는 리더는 한층 더 주의 깊게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프로페셔널도 물론 없지야 않지만, 엉성한 지식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신 있게 펼치며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을 현혹하는 인물 또한 적잖이 존재는 하거든요. 그런 리더에게 맡겨진 프로젝트의 귀결은 결국 어떠하겠습니까. “곤경에 빠지는 건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마크 트웨인)
*이 글은 2021년 10월 22일 개인 링크드인에 업로드한 아티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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