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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가든 Apr 03. 2021

겨울 강을 건너다

한파주의보가 내렸다는 안내 문자를 자주 받는다. 저만치 보이는 원천호수 가장자리가 얼었다. 넓은 물 한가운데만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속살거린다.     


내가 어른이 되기 전에는 더 춥고 눈도 많이 내렸다. 눈을 이고 있던 큰 소나무 가지가 따다닥 소리를 지르며 부러지던 아침이 생각난다. 소나무는 사철 솔잎을 달고 있어서 눈 많은 해에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쉽게 꺾였다. 무참하게 부러져 속살이 허옇게 드러났다. 나무가 부러지는 장면을 직접 본 건 처음이어서 와!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마당에 푹푹 쌓인 눈을 넉가래로 밀고 싸리비로 쓸어 냈다. 그러는 사이 화롯불에는 보글보글 토장국이 끓었다. 아침 노동으로 얼굴이 발그레해진 식구들이 화로를 둘러앉았다. 갓 지은 밥에 뜨거운 된장국을 푹푹 퍼 올려서 후후 불며 먹었다. 어느 맛집이라고 그 맛을 흉내 낼 수 있을까.    

  

사실은, 겨울에 눈이 오는 것은 그다지 큰일도 아니었다. 우리 동네는 강물이 얼어붙는 것이 걱정이었다. 동네에서 대전으로 나가려면 강을 건너야 했다. 평시에는 큰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 얇은 어름일 때는 노를 이용해서 얼음을 깨며 배가 다녔지만 한창 추울 때는 강물이 꽝꽝 얼어붙었다. 그런 날은 얼음 위를 걸어서 건너야 했는데 강폭이 얼마나 넓었는지 기억으론 한참을 걸어왔다.     


겨울방학 때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은 캄캄한 밤중이었다. 대전에서 버스를 타고 신탄진에 내려서도 20분을 걸어야 나루터에 도착했다. 강이 얼지 않을 때야 배를 타고 함께 건너는 이들이 있었지만, 강물이 얼어붙으면 혼자서 얼음 위를 걸어가야만 했다. 요즘처럼 가로등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차가운 달빛만이 강을 비추었다.     


얼음 위를 걸을 때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강 가운데로 나아가면 어름 속에서 뚜둑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딱 멈춰졌다. 어름 땡이다. 심호흡하고 다시 살금살금 걸어갔다. 어른들 말로는 어름이 더 단단하게 조이는 소리라고 했다. 그 말을 믿는다 해도 무서운 건 마찬가지였다. 누구라도 함께 건너는 사람이 있는 날은 훨씬 나았다. 불안함을 함께 나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 테다. 아무 말 안 해도, 서로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의지가 되었다. 달이 뜬 날은 동네 쪽 나루터로 올라가는 길이 달빛에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그것이나마 비춰주니 좋았다.     


엄마가 마중을 나오시기도 했다. 강 건너에서 오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달빛은 밝지 않았다. 사람이 건너고 있다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엄마는 소리쳤다.

“거기 오는 사람이 우리 oo이냐? ”

얼마나 반가웠던지 나도 크게 대답했다. “응, 엄마! ”

엄마가 강 쪽으로 내려와 함께 건넜다. 너무 늦어서 어쩌냐고, 배가 고파서 어쩌냐고 걱정하며 걸었다. 한참을 더 걸어서야 집에 도착해서 밥을 먹었다.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서고 돌아와서 먹는 뜨거운 밥, 무엇을 먹어도 맛있었다. 마음이 놓이고 따뜻해서.   

  

오래전에 고향 마을을 떠나왔다. 편리한 아파트에 살기 위해서, 직장 가까이 가기 위해서. 그 후로 대청댐이 만들어졌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너지 않게 된 것도 수십 년이 지났다. 이제는 방한이 되지 않는 교복 차림으로 겨울 강가에서 배를 기다리는 일도 없다. 어스름 저녁에 얼음 위를 마음 졸이며 걷지 않아도 된다.

영하 17도 추위가 왔다고 외출을 망설이고 바람 부는 밖을 내다본다. 안락하게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겨울 강을 건너던 그때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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