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기분이 우울해서 술 한 잔 해야겠다는 말
술을 마실 줄 아는데 절제하는 것과 입에도 못 대서 마시지 못하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특히나 사회생활이란 걸 하다 보니 술이 갖는 의미가 더 각별해지긴 했다. 나 같은 경우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으나 가뭄에 콩 나듯 맥주 한 캔씩 하는 사람이지만 작은 캔 하나도 다 마시지 못한다. 그런데도 남길 맥주 캔을 굳이 따는 건 탄산으로도 만족 못하겠다 싶은 특유의 시원함 때문이다. 결혼하고 아기 낳으면서는 어쩌다 마시던 맥주 한 잔도 아예 없었던 사람처럼 지내고 있지만 그게 그립다거나 못 먹어서 죽겠다거나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이렇게 '술. 알. 못'인 나도 맥주가 생각나서 500cc든 1000cc 든 벌컥벌컥 마시고 싶은 때가 있다. 현대인에게 그저 인사말처럼 되어버린 익숙한 감정이고 안녕이란 말보다 더 먼저 듣게 되는 적도 있는 가벼운 인사 같은 단어. 바로 우울이 몰려올 때다. 우울이란 녀석은 몹시도 못됐고 한 번 찾아오면 쉽게 가려고 하지 않는 염치없는 손님과 닮아있다. 더 최악인 건, 낭만을 운운하며 나조차 그 녀석을 핑계 삼아 데리고 있으려고 할 때가 있다는 거다. 옷에 묻은 하얀 먼지 하나는 잘도 떼내려 하면서 시컿멓거나 빨갛거나 하는 오염을 빨려고 들지는 않는다.
스물일곱 살, 원하던 직종에, 원하던 분야에 지원을 했다. 자격이 완벽히 채워지지 않는단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냥 머뭇거리고만 있기엔 너무 욕심이 났고 나에게 물방울만큼이라도 붙어 있을지 모를 운을 믿고 싶었다. 건물 안은 따뜻했고 사람들은 친절하진 않았지만 예의는 지키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뭐 좀 드릴까요? 커피? 녹차?' 거기에 내 대답은 '녹차 주세요. ' 였다. 커피를 마시면 내 마음에 긴장이 조절 불가로 박살이 날 것 같았다. 카페인의 위력은 대단한 거였으니까. 내 서류를 훑어보던 상대는 내 짐작대로 '자격이 충분하지 않음'을 계속적으로 걸고넘어졌다. 전공이 아니란 말부터 자격증 얘기까지 처음부터 예상했던 질문과 말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그것까지는 감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내 바운더리 안에 있던 내용이었으니까. 하지만 상대방의 다음 말은 진심으로 내 마음을 때려 박았다. 그리고 울컥 눈가가 뜨거워지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말을 했다.
'참 현실감 없이 살았네요?'
'돈 되는 일은 안 하고 말이에요. '
오기가 생겼다. 눈가는 빨개졌지만 뜨겁던 녹차 한 모금을 삼키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볼 수 있겠지만 난 열심히 살아왔고 후회하지 않는다. 즐거운 시간들과 배움의 시간이었다.라고. 그때 난 정말 상대방의 심리가 궁금해졌다. 이런 식이면 날 서류전형에 합격시킨 이유가 뭐야. 면상이나 한 번 보자? 현실감 없던 내 이력에 관한 이야기들이 궁금해졌나. 도대체 사람 엿 먹이는 거야 뭐야? 하고 말이다. 그러며 내게 인상이 좋다 자격이 충족만 된다면 일을 잘할 타입이긴 한 것 같다. 병 주고 약 주는 말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어디 가든 인사는 잘하라고 교육받아왔으니 기똥차게 인사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11월 늦은 가을이었다. 길바닥은 은행잎들이 빼곡히 쌓여서 노란 카펫을 깔아놓은 것 같았고 코트 깃을 파고드는 바람이 유난히 차가웠다. 내 살아온 길이 처참히 무시당해 짓밟히는 기분이었다. 밟고 선 은행잎들이 나 같아졌고 그렇게 생각하니 떨어지는 낙엽에도 미안했다. 나의 삶과 내 열심의 인생 여정을 왜 당신이 맘대로 평가절하하고 잣대를 들이대지? 그때의 내가 얼마나 빛이 났는지 당신은 모르잖아?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아름답지만은 않았을 텐데? 차마 하지 못했던, 별처럼 많은 말들이 공중부양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강소주를 마셨다. 편의점에 들러 참치 한 캔과 소주를 샀지만 참치는 장식일 뿐 메인은 소주였다. 딱 일곱 잔이 나왔다. 그리고 취했다. 겨우 투명한 일곱 잔에 나는 취하고 세상이 흔들렸다. 지인의 전화도 받지 못했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처음으로 숙취해소 약을 먹어봤다. 그리고 찾아온 깨달음이란, 뇌를 꺼내 빨고 싶다는 육체적 고통과 날 위한 배려가 없었구나 싶은 죄책감 마지막으로 나에게 모욕을 줬던 상대방을 향한 괘씸함은 결국 나에게 화살로 돌아왔던 거구나 하는 사사 실이었다. 젊어서 겪는 좌절은 아프긴 하겠지만 곧 나아질 거라 생각했던 나의 자만이 빛을 발했다. 상처 받은 마음과 세상으로부터의 소외는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도 오랜 시간이 지나 회복이 되면서는 여전히 분노는 치밀었어도 이성적 생각과 냉정한 판단은 가능해졌다. 꽃에게 거름이 필요하듯 외부의 공격이 면역과 성장에 일조는 했음을 아는 것이다. 우울해서 술 마시지 말자. 태어난 이상, 우리가 태어났다는 이유와 그래서 누리고 사는 모든 즐거움 속엔 이런 고통과 상처들이 부가세처럼 포함되어 있다는 걸 기억하자. 그렇게 부가세 붙여서 물건 사다 보면 언젠가 VIP 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