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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도끼, 은도끼>, 내 안의 산신령

복잡한 세상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법

by Nova G

Q.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주웠다면 어떻게 할 거야?

A. 만 원을 주웠다면 나는 경찰서에 갖다 줄 거야.

왜냐하면 엄마가 자기 자신에게 떳떳해야 한다 했으니까.


큰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쓴 세 줄 쓰기다.

아침마다 아이가 세 줄을 쓰면, 나는 공짜로 많은 것을 얻는다.

어떤 날은 배꼽을 잡고 웃을 만큼 재미를 주고, 어떤 날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때로는 뜻밖의 슬픔을 맛보기도 한다.

이날의 세 줄을 읽은 날은, 억만금을 받은 것보다 감동이었기에 눈물을 조금 흘리고 말았다.

이 아이가 자라는 동안, 중요한 신념 한가지는 엄마가 심어준 것 같아 뿌듯함도 느꼈다.


평소 아이를 믿어주려 노력한다. 아들이 커가며 늘어가는 잔소리를 줄여보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숙제를 스스로 잘 마쳤는지, 그날 해야 할 일은 다 하고 게임을 하는 건지, 일일이 캐묻기보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신을 속이면 안 돼. 자기 자신에게 떳떳해야 해. 엄마는 **이를 믿어.”

그 말이 아이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나보다.


그날 이후, 나는 아들이 쓴 문장을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그 문장은 또 다른 질문을 불러왔다.

인간은 언제부터 ‘양심’이라는 것을 알고 살게 되었을까.

그리고 양심적인 행동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아이 세 살 무렵, 나는 좀처럼 자려하지 않는 아이를 재우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했다.

그때 떠올린 이야기가 바로 <금도끼 은도끼>였다. 아마 우리 아이가 처음으로 들은 전래동화였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얼마나 여러 번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아이는 내가 목소리를 바꿔가며 "금도끼가 네 도끼냐?" 할 때 긴장하기 시작했고 "네 이놈!" 할 때 눈을 크게 뜨고 웃었었다.

마치 자기가 거짓말을 했다가 들킨 것처럼 표정을 짓고 몸을 움찔이곤 했다.

‘양심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쩌면 그렇게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레 새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이에게 전하고 싶었던 '자기 자신에게 떳떳함'이란 비단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로는 자기 자신을 검열하는 판단의 기준을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찾길 바랐다.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를 그릴 때 이런 일화가 있다고 한다.

교황 율리오 2세의 명으로, 그는 익숙하지 않은 천장화 작업을 맡게 되었다. 조각가였던 그에게 교황의 명은 어쩌면 무리한 요구였다.

4년 동안 매일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림을 그리는 미켈란젤로를 보고 한 친구는 안타까운 마음에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부분만 열심히 하고, 나머지는 대충 해. 누가 그렇게 자세히 보겠어?”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알아. 최선을 다했는지 아닌지는.”


우리는 "이 정도면 됐어." 하고 너무 쉽게 한계를 긋는다. 최선을 다했다, 열심히 했다는 기준은 때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한 사람은 자신과 타협하거나 남을 속이지 않는다.


두 번째로는 흔들리지 않는 소신을 갖길 바랐다.

아이는 크면서 배울 것이다. 금도끼도 은도끼도 내 것이 아니라는 정직한 발언을 해야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많다는 것을.

살다 보면 옳고 그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또한 눈앞의 유혹이 손짓할 때, ‘양심’은 늘 가장 먼저 흔들린다.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의 주인공 필립은

양심적으로 힘든 선택을 할 때마다 ‘길모퉁이에 경찰관이 서 있다’고 상상한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그만의 방법이었다.


욕심을 부리면 화를 입고, 정직하게 살아야 복을 받는다. 그러니 늘 자신의 것에 충실해야 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금도끼 은도끼>의 교훈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 세상 속에 그것을 적용하며 살기란 너무 어렵다.


나는 아직도 거짓말을 하면 산실령이 나타나 "네 이놈!" 할까 봐 두려워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난다.

너무 단순하게 주어진 '정직에 대한 강요'이지만

들어본 적도 없는 산신령의 목소리는 어쩌면 나를 이만큼 정직하게 키워준 나만의 ‘경찰관의 목소리’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그 목소리가 내 아이의 세 줄 속에서 다시 들려온다.

“엄마가 자기 자신에게 떳떳해야 한다 했으니까.”

'양심’이란 누가 심어주는 규범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깨어 있는 의식의 불빛인 셈이다.

누가 보지 않아도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

누가 묻지 않아도 대답해야 하는 양심의 목소리,

그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세우는 가장 고요한 힘일 것이다.


그 목소리가 세상의 불확실함 속에서도 스스로의 기준을 잃지 않고, 옳고 그름이 뒤섞인 혼란의 순간마다 내면의 나침반이 되어주기를, 눈앞의 욕망이 이성을 흔들 때마다 더욱 단단히 자신을 붙드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성장한 양심이 결국 그 아이를, 그리고 나를 지켜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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