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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글 Oct 20. 2022

꿰맞추는 삶은 이미 지쳤다

결이 맞는 세상이 지구 어딘가에는 반드시 존재한다

지방대생에 별 볼 일 없는 스펙, 특히 영포자였던 나는 대한민국의 루저다. 아무도 나를 고용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고용주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나보다 좋은 옵션이 훨씬 많다. 직장을 구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하는데 어떻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하지만 대한민국에서의 행복은 성적순이었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공군 학사장교로 군 생활을 하였다. 지방대 졸업생이었던 내게 그나마 좋은 조건으로 일을 시켜준 것은 다름 아닌 군대였다. 하지만 군대에서도 성적순으로 군번을 주고 성적순으로 내가 가고 싶은 부대에 갈 수 있었다. 군대에서도 성적이 좋으면 행복해졌고, 성적이 안 좋으면 불행해졌다. 하지만 나는 대한민국에서 그리 좋은 성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기회는 나에게 오지 않았다.



실례지만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실례지만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 실례하는데 왜 질문을 하는 것일까? 아마도 사회에서 일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고 가장 듣기 싫었던 개인적인 질문이 아닐까 싶다. 상관이고 직장 동료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나의 출신 대학을 궁금해한다. 아니면 이게 아킬레스건이라 너무나도 숨기고 싶은데 자꾸만 들추어내는 사회에 지쳐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대학을 묻는 말로 끝이 난다면 크게 불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 뒤에는 수사가 꼭 뒤따른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안 했구먼.”, “공부 잘할 것 같은데 안타깝네요.”, “거기는 국립대인가요?” 나는 소위 말하는 지방대 출신이다. 지방 사립 4년제 대학, 그게 나의 간판이다. 수능을 망쳐서 지방대에 간 것이 아니다. 그게 나의 실력이었고 재수하고 삼수한들 더 나아질 것은 없었다. 지금은 블라인드 채용, 지역인재 채용 등 다양한 이름으로 대학이라는 간판을 가리고 기업에 입사하겠다는 도전장을 내밀지만, 내가 한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과탑을 하던 과 선배조차 줄줄이 대기업 서류전형에서 떨어졌다. 거기서 나는 나의 미래를 미리 점지했다.



최대한 대학 간판이 필요 없는 일을 찾았다. 전문직이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대학수학능력시험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내가 전문직 시험에 쉽게 합격할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문직 시험을 보는 것보다 수능을 다시 보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갔고 손에 잡히는 결과는 하나도 없었다. 내가 4학년이 되었을 땐, 이미 4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날아가 버렸고 나의 이력서에는 달랑 지방 사립 4년제 대학 졸업장이 전부였다. 4년의 세월을 너무 안일하게 살았다. 하지만 후회해도 너무 늦은 후회였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때다.”라는 문구를 보면서 나를 달래 보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대학 간판에서부터 남들보다 뒤처져 있었는데, 대학을 졸업하려고 하니 이제는 뒤집을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벌어졌다. 그래서 학벌 세탁을 시도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의 대학원에 지원했다. 지방 4년제 대학생이었지만 가방 잘 들고 성실히 학교에 다닌 덕분에 학점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나의 이력서에는 적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남들 다 하나씩 가지고 있는 공모전 입상도 졸업 논문이나 졸업 작품 입상도 없었다. 그래서 학점 잘 받은 것이라도 보여주기 위해 학기별로 학점을 적었다. 그리고는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다. 부랴부랴 버스표를 예매하고 교수님을 찾아뵈었다. 내 이력서를 쭉 보시곤 몇 가지 질문을 하셨다. “자네, 토익 점수도 없네?”, “네. 하지만 학교는 성실히 다녀서 과탑도 세 번 했었습니다. 기회를 주시면 열심히 공부해서 토익 점수도 만들고 연구실에 반드시 도움이 되는 학생이 되겠습니다.”, “음, 알았네. 그럼 한 번 지원해보게.” 그렇게 나는 서울 소재의 대학원에 지원했다. 딱 한 곳에만 지원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원 중 유일하게 토익 점수를 지원서에 입력하지 않는 곳이었다. 내가 인생에서 걸었던 첫 도박이었다. 합격은 순전히 경쟁률이라는 운에 맡겨야 했고 떨어지면 끝이었다. 만약에 떨어진다면 아무 계획도 없이 군대에 끌려가야만 했다. 하지만 하늘은 세상을 뒤집을 첫 번째 기회를 나에게 주셨다. 합격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니며 교수님의 수업 조교를 했다. 모든 학생이 열심히 수업을 들었고 대학 과제의 수준이 나의 대학 논문 수준이었다. ‘이러니 지방대가 인서울을 이길  없지.’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서울의 대학원에 오기 전에 나에게 대학이란 단순히 간판이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공부하는 대학생들을 보니 대학은 단순히 간판이 아닌 그들의 4년간의 노고였다. 내가 지방대를 다닐 때는 방학이 되면 학교에 학생이 아무도 없었다. 도서관은 텅텅 비어 있었고 캠퍼스 바닥에는 버려진 맥주캔과 소주병만이 굴러다녔다. 하지만 서울의 대학은 방학이 없다. 단순히 수업이 없다 뿐이지 방학에도 도서관은 만석이다. 도서관에는 보고 싶은 책이 이미 대출 중이라 반납일을 계속 기다렸다. 누구도 인생을 허비하지 않았고 대학생들의 술자리에서 오가는 대화는 나에게 이미 대학 졸업생의 대화와도 같이 느껴졌다. 나는 그때 내가 살았던 곳이 얼마나 좁은 곳이었는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대학원을 마치고 공군 학사장교로 입대했다. 이제는 군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석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특별전형에 지원해서 입대하였다. 공군 학사장교가 되겠다고 지원한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로 가득했다. 하버드 졸업생도 있었고 해외의 유명한 대학의 졸업생들이 대한민국에 이렇게 많은 줄 그때 알았다. 지방대생은 정말이지 한 기수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리고 그게 나였다. 아무리 석사를 가지고 특별전형으로 왔어도 결국에는 대학을 지울 순 없었다. 대학원은 대학이 아니라 대학원이란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아무리 세탁해도 지울 수 없는 얼룩이 있고, 지방대는 나에게 그런 얼룩이었다. 공군에서 장교로 근무하면서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라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공군 학사장교’ 하면 화려한 스펙을 생각하기 때문에 나에게도 단순한 호기심에 물어봤던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질문이 불편했다. 공군 장교는 어쩌면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이라는 간판은 나에게 더 이상 간판이 아니었다. 어쩌면 간판 인적이 한 번도 없었다. 돼지가 도살되고 고기에 등급이 매겨지듯 내가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지워지지 않는 등급 표시였다. 나는 처음부터 잘못 바느질된 옷을 다 버리고 천부터 새로 준비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민이라는 녀석이 나의 가슴에 천천히 다가왔다.




술 때문에 흥하고 망하는 인생

원래 술을 못 마시는 편이 아니었다. 대학 동기들에게 물어보면 나를 술을 못 마시는 친구로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틀에 한 번은 무조건 술자리에 나갔다. 어쩌면 매일 나갔을 수도 있다. 하루에 소주 6병까지도 마셨고 술자리에서 웃고 떠드는 생활이 즐거웠다. 그 즐거움이 나중에 독이 되어 돌아올 거라는 생각은 아무도 못 한 채 모두가 웃고 떠들었다. 그렇게 2년을 술로 살았다. 그리고 과탑이었던 과 선배가 모든 대기업 서류전형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선배는 쓰리기사(기사 시험에 최종 합격해서 기사가 2개면 쌍기사, 3개면 쓰리기사라 부른다)였음에도 ‘지방대’라는 간판 때문에 떨어졌다. 나에겐 그 모습이 적잖은 충격이었다. 중학생 때는 당연히 SKY에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대학에 와서는 당연히 대기업에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것은 올바른 이치에서만 작동한다. 공부를 안 하면 SKY는 못 가고, 대학 간판이 구리면 대기업에 가기 쉽지 않다가 당연한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술을 끊었다. 잠시 멈춘 것이 아닌 완전히 술과 작별을 했다. 당연한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한 노력이 필요했다.



술을 마시는 대신 책을 읽었다. 책을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 몰라서 가지고 있는 전공 책부터 봤다. 그렇게 술을 끊은 대가로 나는 과탑의 자리를 얻었다. 4년의 세월, 여덟 번의 학기 중 2년은 술로 날리고 남은 네 번 중 두 번 올 A+을 받았고 세 번 과탑을 하였다. 하면 되는데 지금까지 하지 않았다. 술로 날린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더 뒤처질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무섭게 다가오는 세상의 파도를 넘기에 턱없이 부족함을 느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이가 내 편은 아니었다. “오늘 딱 한 번만 먹자.”, “남자가 술도 좀 할 줄 알고 그래야지?” 언제나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많은 유혹이 있었다. 하지만 술은 나에게 단순한 알코올을 넘어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를 구분 짓는 상징이었다. 새로운 술자리마다 술을 먹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려니 나중에는 지쳤다. 그래서 그냥 “원래 술을 못 먹어요.”라고 넘어갔다.



대학이나 대학원에서는 술은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술을 먹지 않으니 안 되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음, 술을 먹는 사람이 쉽게 가져가는 것이 많아 보였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근무평정은 누가 업무를 잘했고 많이 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상관에게 더 많은 술을 따라줬는지의 척도였다. 술을 먹지 않는 나의 친구들과 동료들은 그것을 ‘정치질’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정치질을 잘하려고, 그리고 그런 상관에게 인정받고자 다시 술을 마시고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술을 안 먹는 대신 하루에 더 많은 시간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는 시간뿐 아니라 다음날 숙취로 고생하는 시간까지 합하면 무시하지 못할 시간이었고, 그렇게 내 신념을 끝까지 지켜나갔다.



군대에서 사회생활을 했던 총 5년의 세월 중 2년 반은 술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정치질하지 않으니 아무리 소처럼 일해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회식한 이후에 사무실에 들어가서 일한 적도 많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친한 ‘비주류’ 동료도 그랬다. 동료가 있기에 외롭지 않았지만, 나의 목줄은 동료가 아닌 상관이 지고 있었다. 결국은 본인들이 잘못한 일에 대해 누군가는 문책당해야 했고 나는 희생양이 되었다. 하지만 억울하지 않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런 모습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업무 역량을 높이기 위해 관련 전문 지식과 법규를 공부했고 어느새 같은 계급 또는 연차의 동료보다도 월등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나의 하루는 그들의 하루보다 항상 길었다. 다행히 남은 2년 반의 군 생활은 이런 나를 이쁘게 봐주시는 분을 만났고 군 생활을 즐겁게 마쳤다. 그리고 그분도 ‘비주류’셨다.



그분을 통해 비주류가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았다. 비주류가 정치질 없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일을 아주 잘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아주 잘 말이다. 그 사람이 아니면 그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절대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분은 나에게 그런 분이셨다. 그분은 사관학교 생도 시절에도 유명한 천재였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모습은 그분과 완전히 달랐다. 나는 그렇게 그 조직에서 살아갈 수 없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내 앞에는 두 개의 선택지가 보였다. 다시 술과 친해지느냐? 아니면 이 조직을 떠나느냐?




워라밸이라 부르지 않는다

“오늘은 워라밸(Work-Life Balance) 금요일이라 일찍 퇴근하는 날입니다!” 공군 장교 생활 마지막 해에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워라벨 금요일이 시행되었다. 매달 마지막 주엔 근무 시간을 조정하여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매일 30분씩 연장근무를 하고 금요일에는 2시간 일찍 퇴근한다. 워라밸 금요일에는 초과근무(야근수당을 받을 수 있는 연장근무)가 안 된다. 야근하지 말고 집에 가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라는 취지이다. 이게 과연 제대로 작동할까? 나는 워라밸 금요일에 일찍 퇴근했지만, 토요일에 다시 출근해야만 했다.



총 5년의 장교 생활 중 2년 반은 공군부대에서 생활했다. 술 때문에 힘들었던 바로 그다음 시기이다. 운 좋게 공군에서 일하면서 미국 정부와 Lockheed Martin(F-35 제조사)과 일할 기회가 있었다. 캐나다로의 이민을 고민하던 나에게 그들의 생활을 관찰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항상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내가 볼 땐 전혀 바빠 보이지 않았다. 그리곤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서는 2~3주 휴가를 나갔다. “Me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라는 말이 왜 나왔을까? Merry Christmas라고 인사하고 New Year가 되어서야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워라밸이라 부르지 않았다. 매년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이다.



대학 4학년 때 캐나다 밴쿠버로 2주간 여행을 다녀왔다. 그중 1주일은 밴쿠버 근처에 있는 사촌누나 집에 머물면서 캐나다 생활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내가 사촌누나 집에 있는 동안 누나의 남편(캐나다에서 태어난 캐네디언)은 매일 오전 근무만 하고 오후에는 우리와 시간을 보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물어봤다.

“어떻게 매일 오전만 일하고 집에 와?”,

“집안일이 있다고 하고 왔어.”,

“그렇게 매일 빠져도 괜찮아?”,

“문제없어(웃음).”

캐나다 대부분의 회사는 일일 8시간을 초과해서 근무하지 않는다. 필요한 경우 탄력 근무를 할 수도 있고, Day off(연차)를 쓸 수도 있다. 캐나다에서는 오후 4시가 되면 러시아워가 시작된다. 그리고 여름에는 저녁 11시까지 해가 지지 않는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자유시간이 그들에게 있는지 상상해보라. 캐나다에서도 그것을 워라밸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저 일상일 뿐이다.



‘워라밸’이라 이름 붙이는 순간 그것은 일상이 아니라 특별한 날이 되어버린다. 평범한 일상에 우리는 이름을 붙여 부르지 않는다. 더 분명한 것은 함께 일하는 모두가 워라밸을 갖지 않는다면 그 순간에도 일은 진행되고 있고, 일은 처리하지 않으면 쌓이기 마련이다. 만약 한국에서 워라밸을 즐기고 있는데 일이 쌓이고 있지 않다면, 엄청난 업무 천재이거나 또는 주변에 그 일을 처리하고 있는 호구가 있을 것이다. 그 호구가 나였다. 그래서 결단했다.



이민을 결심하다

더 이상 대학을 물어보는 질문과 학벌이라는 스펙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고, 나의 미래를 술에 맡기고 싶을 만큼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무늬만 워라밸이 아닌 진짜 워라밸을 즐기고 싶었다. 무엇보다 한 번뿐인 인생, 결이 맞는 세상에서 평생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싶었다. 그렇게 캐나다 이민을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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