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쩌다 윤작가 May 14. 2021

09_영알못이어도 문제없어!

친구를 사귀다

일주일 정도 임시반 생활이 끝나고 딸아이는 1학년과 2학년이 반반 섞인 G1-2반이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선생님이었다. 그 반에는 약간 돌봄이 필요해 보이는 1학년 남자아이가 있어 보조 교사가 같이 있는 반이었다. (특수아동이 있는 경우는 보조 교사가 배치되는 것 같았다. 그다음 해에는 보조 교사가 없는 반이었다.) 전부 20명 정도였는데 한국 아이는 우리 딸 포함 두 명. 조기유학 선배인 1학년 남자아이가 있었다. 학교 전체에는 전교생 약 250명 중 이민자와 조기유학생 포함 한국 아이들이 15명 내외로 있었던 것 같다.


딸아이는 임시반 때 옆자리에 앉아 처음 사귄 캐내디언 친구 셰니즈와 같은 반이 되었다고 너무나 좋아라 했다. 아프리카 드럼 공연 보러 갔을 때 그 바쁜 틈을 타 신이 나서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엄마 나 얘랑 사귀었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울 .. "What's your name? I'm Angela. Nice to meet you." 이렇게 사귀게 되었단다.. ㅋㅋㅋ 딸아이는 그 아이 이름이 '샤이니'라고 하는데, 내가 물어보니, "셰니즈(Shanese)"라고 하는 것 같다. 앤젤라가 아직 영어를 못하니 좀 도와주라고 부탁했다.



"Are you ready?" "Yes!"


아이들은 역시 몸으로 친해진다. 학교 시작하고 이틀 만에 이렇게 친해져서는 학교가 끝나고도 놀이터에서 이러고 거의 1시간을 논다.. 말도 안 통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잘 노는지 참 신기하다.. 셰니즈가 Are you ready? 하면 울 수는 어떻게 또 알고 "Yes!" 한다.. ㅋㅋㅋ




정규반 첫날은 짐이 많아서 갖다 주느라고 교실까지 따라 들어가 봤다. 학년이 시작할 때 1년 치 학용품을 다 사 갖고 가야 한다. 돈 많이 들었다. 학교마다 전부 이렇게 한꺼번에 사야 하니, 마트마다 학용품 코너가 따로 개설되어 있고, 품절이 되는 일도 있다.. 난 사 오라는 물감 찾아 삼만리 했다는.. 여기 애들은 필통이나 가방이나 다 엄청 크다.. 한국에서 메던 울 딸 책가방 보고 귀엽단다 ㅎㅎ (품질이 좋아 보인다고도.. 이건 백퍼 사실이다..)  



G1-2반 풍경



첫날부터 용감무쌍한 울 딸.. 이것저것 가정통신문이 많으니, 선생님이 아이들을 시켜서 나눠주셨단다.. 그게 하고 싶어서 저도 손을 들었다나..


"그 하늘색 종이는 내가 나눠준 거야"  

"네가 어떻게 알고 그런 걸 했어?"  

"선생님이 종이 뭉치를 흔들어서 내가 손 들었어"

“ㅎㅎㅎ”




학년 초라 매일매일 받아오는 게 많다. 여긴 가정통신문들이 참 칼라풀하다.. 아이의 얼굴이 찍힌 사진이나 이름, 작품 등이 신문 같은 매체에 실려도 되냐 안 되냐 묻는 가정통신문도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개인정보나 초상권 등에 대한 규정이 강화되었지만, 그 당시엔 그런 가정통신문이 신선했다.


그중 가장 신선한 충격이었던 건 학년초에 부모에게 emergency letter(정식 명칭은 comfort letter라고 불렀던 것 같다. '안심시켜주는 편지'라는 의미겠지?)를 써오라는 것이었다. 밴쿠버도 환태평양 조산대에 속하는 지역이라 혹시 학교에 있는 동안 지진이나 기타 자연재해 때문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고립되어 무서워할 경우를 대비하여, 자녀를 안심시키는 편지와 가족사진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1년간 담임선생님이 보관했다가 돌려준다는.. 다행히 2년 동안 우리 아이가 그 편지를 읽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수야..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 바로 곁엔 엄마 아빠가 없겠지만, 이 사진 보고 이 편지 읽으면서 엄마 아빠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고.. 조금만 있으면 엄마 만날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무서워하지 마”라는 말로 시작하는 편지를 썼는데 오글거려서 다 옮길 수 없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섬세함이었다. 가끔씩 이래서 선진국인가 싶은 그런 섬세함과 배려가 느껴지는 경우들이 있었는데, 또 하나의 경우는 한 달에 한 번 급식비를 낼 때였다. 매달 55달러 정도의 급식비를 (학교에서 나눠준) 봉투에 넣어 내곤 했는데 사정이 안 좋은 집은 그냥 빈 봉투만 봉해서 내도 되는 시스템이었다. 주로 개인 수표 한 장을 넣어서 내니까 빈 봉투로 내도 별로 티가 나지 않는 거다. (그 당시 우리나라와 달리 인터넷 뱅킹이 일상화되지 않은 아날로그 감성 충만한 캐나다였다. 지금은 캐나다도 인터넷 뱅킹을 이용한다고 들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의 어린 시절 육성회비 안 낸 아이들을 칠판 앞에 불러 세워 창피를 주던 때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이전 08화 08_두구두구두구 드디어 캐나다 학교 입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