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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Apr 17. 2020

밑줄 민주주의

형광펜은 민주주의를 해친다

   책을 읽으며 중요하다 싶은 문장에는 어김없이 연필로 밑줄을 긋는다. 감성을 훅 치고 들어오는 문장을 접할 때면 물결무늬 밑줄을 긋는다. 까마득한 옛날, 교과서라 불리는 책을 읽을 땐 그냥 밑줄을 긋지 않고 자를 대고 반듯한 직선을 긋곤 했다. 뭔가 정갈하고 정리가 잘 된 느낌을 원했나 보다. 그러면 공부가 더 잘 될 줄 알았나 보다. 몇 장을 그렇게 일일이 자를 대고 긋다가 이내 귀찮아져 그냥 손으로 쭉쭉 밑줄을 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좀 더 강조해야겠다 싶을 땐 형광펜을 쓰기도 했다. 꼭 외워야 하는 단어 같은 곳에 야광 녹색 형광펜을 들이댄다. 주황색 형광펜이 눈에 더 잘 띄는 것 같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단어엔 주황색 밑줄을 긋기도 했다. 그러다 펜 바꾸는 걸 깜빡해 녹색으로 그어야 할 것을 주황색으로 긋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 헛갈리고 나면 펜 색깔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야광으로 얼룩진 글귀를 보고 있자니 눈이 아파 자주 책상에 엎드려 잤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이후로는 웬만하면 연필로 밑줄을 긋는다. 너무 삐뚤어진 선을 그었다 싶으면 지워도 되고, 눈도 덜 피로하다. 나중에 다시 볼 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으면 다시 지울 수도 있다. 


   대학원 세미나 수업을 들을 때다. 영어 원서의 각 챕터를 학생들이 하나씩 맡아 번역하고 정리해서 발제문이라는 걸 만든다. 각자 정리한 발제문을 서로에게 나누어 주고 발표를 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발제문을 작성하면서 친절하게도 중요한 부분을 굵은 글씨로 강조하고 아예 밑줄을 그어놓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교수님이 그런 친절한 발제문을 받으시고는 학생에게 가벼운 핀잔을 던진다. “자네는 왜 밑줄을 쳐오는 건가. 자네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해서 다른 사람도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디가 중요한지는 읽는 사람들 각자가 판단하는 거네. 그게 민주주의의 기본 아니겠나.” 일견 맞는 말이다. 


   중고 책을 잘 사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끄적끄적 책장 귀퉁이에 써놓은 낙서도 거슬리고, 여기저기 그어놓은 밑줄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도 같다. 밑줄의 권위주의적 횡포에 대한 반발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대부분의 중고서점에서는 다섯 장 이상 밑줄 쳐진 책은 매입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중고 책을 즐겨 사본다. 대부분 책이 거의 새 책에 가깝기도 하거니와 이제는 밑줄이나 낙서가 책에 묻어 있다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재밌을 때도 있다. 누군가 밑줄을 남겨 놓은 문장들을 읽으며 왜 여기에 밑줄을 그었을까,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마음을 기울여 본다. 그 누군가의 밑줄에 공감하면 나의 밑줄을 더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오히려 밑줄 가득한 책들이 더 소중할 때도 있다. 풀바디의 독후감을 느낀다고나 할까. 이제 나는 남이 그어놓은 밑줄 따위엔 영향받지 않는,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도 아는, 보다 성숙한 독자로 거듭난 것이다. 이를테면, 주체적이고 민주적인 독자가 된 것이다. 


   중고서점도 이제 밑줄과 낙서 가득한 중고 책을 허하라. 밑줄과 낙서를 입은 중고 책은 저자와 독자의 교감으로 거듭난 또 하나의 공저 아니겠는가. 낡고 닳은 고서적도 파는데 밑줄 좀 그었다고 거부할 이유가 있는가. 연필 밑줄이면 더욱 그렇다. 오히려 낙서 가득한 중고 책은 좀 더 비싼 값으로 쳐주시라. 그렇게 매입한 중고 책을 누군가 사고, 또 그 누군가가 자신의 밑줄과 낙서를 덧입히고, 그렇게 몇 바퀴 돌면 그 책은 하나의 세상이 된다. 그러니 이제 밑줄과 낙서 가득한 중고 책을 허하라! 단, 형광펜으로 점철된 책은 예외로 하자. 자기 생각을 너무 강조하면 민주주의를 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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