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식탁에서 비빔밥은 한 끼 식사만이 아니다. 그것은 한식의 정수이자, 한국인의 창의성과 역동성을 상징한다. 다양한 재료가 조화를 이루면서도 개별적인 맛을 잃지 않는 비빔밥은, 한국 문화가 가진 유연성과 융합의 정신을 오롯이 담고 있다.
비빔밥 하면, 자연스럽게 여러 색깔과 식감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이 떠오른다. 다양한 나물, 고소한 고기, 윤기 흐르는 계란, 매콤한 고추장이 하나의 그릇 안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숟가락이 들어가는 순간 비로소 완성된다.
비빔밥은 기성식(食)이 아니다. 각자의 손으로 직접 완성해가는 맞춤식(食)이다. 그렇기에 비빔밥에는 정형화된 틀이 없다. 무엇을 넣을지, 어떻게 비빌지는 전적으로 먹는 사람의 몫이며, 그 과정 속에서 한국인의 창의성이 발휘된다.
비빔밥의 역사는 깊다. 제사 후 남은 음식을 섞어 먹던 풍습에서 시작되었다는 설, 농번기에 바쁜 일손을 덜기 위해 반찬과 밥을 한 그릇에 비벼 먹었다는 설, 묵은 나물과 밥을 섞어 한 해를 마무리하던 설 등이 있다.
하지만 그 기원보다 중요한 것은 비빔밥이 시대에 따라 변하고 진화하며 여전히 사랑받는 음식이라는 점이다. 전통적인 전주비빔밥에서부터 돌솥비빔밥, 서구인의 입맛에 맞춘 아보카도 비빔밥까지, 비빔밥은 시대와 환경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유연함은 한국인이 가진 역동성과 적응력을 잘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돌솥비빔밥은 비빔밥의 진수다. 뜨거운 돌솥에 담긴 밥이 천천히 눌어붙어 누룽지를 만들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고 고소한 풍미가 살아난다. 마치 한 사회가 긴 시간 동안 다양한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더 풍부한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과도 닮아 있다.
조선 시대에도 임금과 양반들이 돌솥을 선호했던 이유는, 무쇠 가마솥에 지은 밥보다 뜸이 더 잘 들고 쉽게 식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이 지나도 깊은 맛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일본과 중국에도 각기 문화를 반영한 대표 음식이 있다. 특히, 스시와 차오판(볶음밥)은 이들 국가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스시는 정교함과 절제미를 강조하는 일본 문화를 반영한다. 신선한 생선과 밥, 간장, 와사비 등의 최소한의 재료로 완성되는데, 조리 과정에서의 정확성과 균형이 중요하다.
비빔밥이 다양한 재료를 섞어 새로운 맛을 창조하는 방식이라면, 스시는 각 재료가 가진 본연의 맛과의 조화를 이루는 음식이다. 스시는 정형화된 틀이 존재하고, 요리사의 기술이 강조되는 반면, 비빔밥은 먹는 사람이 직접 창조하는 참여형 음식이라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한편, 중국의 차오판은 실용성이 뛰어나다. 차오판은 남은 밥과 각종 재료를 기름에 볶아 빠르고 간편하게 만들 수 있어, 고대부터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비빔밥과 차오판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조리 방식에 있다.
차오판은 조리 과정에서 만든 이가 모든 재료를 섞어 완성된 형태로 제공하는 반면, 비빔밥은 먹는 사람이 직접 비벼서 완성하는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음식이다. 또한, 차오판은 기름을 많이 사용하는 반면, 비빔밥은 나물과 야채를 기본으로 해 건강한 음식이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은 비빔밥을 이미 섞인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직접 섞어서 새로운 것으로 만드는 ‘섞음의 문화’, ‘융합의 문화’로 해석했다.
비빔밥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은 단순한 혼합이 아니라, 개별적인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조화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인이 가진 강점과도 맞닿아 있다.
빠른 변화 속에서도 개개인의 개성을 유지하며 새로운 트렌드를 창출하는 힘, 다양한 문화와 요소들을 융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창의성, 그리고 낯선 환경에서도 능동적으로 변화하며 적응하는 역동성이 바로 비빔밥이 가진 철학이다.
비빔밥은 하나의 완결된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먹는 사람의 선택에 따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문화적 교류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는 살아 있는 음식이다. 일본의 스시처럼 정제된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도, 중국의 볶음밥처럼 요리사의 손에서 완성되지도 않는다.
비빔밥은 열린 음식이며, 창조적인 과정 자체를 즐기는 음식이다. 한국인의 창의성과 역동성이 담긴 이 한 그릇은, 우리의 문화와 정신을 상징하는 작은 세계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