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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 나만의 작은 성(城), 화장실

by 미라보 Mar 13. 2025


화장실. 집 안에서 가장 개인적인 공간이자, 가장 내밀한 공간이다. 

그러나 여기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 어느 순간 평화는 불안으로 바뀐다. 안락한 휴식처가 조바심을 부르는 감옥이 되는 것이다.



특히 남자들에게 화장실은 단지 생리적인 필요를 해결하는 장소를 넘어, 나만의 작은 "성(城)" 같은 곳이다. 하루 중 유일하게 '아무도 나를 방해할 수 없는 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랄까? 


그러나 그 '성'안에서의 시간이 오래 지속되면? 


가족들의 성난 함성(노크 소리)이 울려 퍼지고, 성문이 강제로 개방될 위험에 직면한다. 그래서 화장실에서의 머무름에는 철저한 자기 절제가 필요하다.



화장실, 예전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예전에는 화장실이 그리 중요한 공간이 아니었다. 특히 공중화장실은 불문가지(不問可知).


악취와 오염, 푸세식의 불편함...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는 일은 필요악(必要惡)이었다. 그곳에서 여유를 즐긴다? 그런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


노르웨이, 우레드플라센 공중화장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화장실의 위상도 달라졌다. 1980년대부터 한국에서는 '화장실 문화 개선 운동'이 시작되었고, 지금의 공중화장실은 혁명적 변화를 이뤘다.


깨끗한 시설, 쾌적한 환경, 심지어 아트 갤러리 같은 인테리어!


특히 대형 쇼핑몰이나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은 작은 오아시스가 되어, 여행 중 피로를 풀어주는 제3의 공간 역할을 한다.


망향 휴게소 화장실



화장실, 가정 내 '전쟁터'가 되다


집 안에서의 화장실은 늘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소다. 우리 집은 3인 가족인데, 화장실도 3개를 필요로 한다. 이른 아침부터 화장실은 전쟁터가 된다. 한 사람은 거울 앞에서 드라이를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문을 잠근 채 나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이는 초조하게 발만 동동 구른다. 


그리고 마침내 문이 열리는 순간, 마치 빈 골대를 향하 듯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연장전에 이어 승부차기를 돌입한다면, 후발주자가 밖으로 나가 해결하기도 한다.



화장실의 추억 확장


어릴 때는 화장실이 오로지 "일 보고 나오는 곳"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이곳의 용도는 확장된다.


드라마, <푸른 거탑>


. 고등학교 때 화장실 _ 친구들과 몰래 담배를 나눠 피우는 은밀한 친목도모의 장소


. 군대의 화장실 _ 졸병들의 유일한 피난처이자, 카페이자, 수면실


. 비행기 화장실 _ 짜릿한 환상의 공간 (변기에 들이대고 담배 연기를 뿜고 동시에 물 내리면, "쎅~"소리와 함께 스트레스가 함께 날아가는 기분!)



화장실, 영화 속에서 계급을 보여주다


영화에서도 화장실은 특별한 공간으로 활용된다.


영화, <기생충>과 <슬럼독 밀리어네어>


  

. <기생충> 상류층과 하류층의 극명한 대비 속에서 반지하 집의 화장실 위치가 계급 구조를 보여준다.


. <슬럼독 밀리어네어> 어린 주인공이 전설적인 배우를 만나기 위해 변기 속으로 뛰어드는 장면과 화장실이 계급과 빈부격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로 사용된다.


이렇듯, 화장실이라는 공간이 단지 생리적 장소가 아닌, 빈부격차와 사회적 구조를 보여주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화장실, '철학적 공간'이 되다


젊었을 때는 빨리 일을 보고 나와야 하는 곳이었던 화장실. 그러나 중년이 되면 이곳은 점점 '명상의 공간'이 된다.


신문을 읽으며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고,

휴대폰을 보며 세상과 소통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편안해도, 화장실에 머무르는 시간은 제한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이곳은 나만을 위해 완전한 자유를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아직도 인지 재촉하고,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줄지어 있다. 이를 인지하는 순간 화장실에서의 평화는 산산조각 난다.



머무를 시간은 정해져 있다




오늘도 나는 화장실에서 나만의 작은 평화를 즐긴다.

이곳에서 나는 세상과 단절된 채 생각을 정리하고, 나를 재충전한다.

그러나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평화의 성은 불편한 감옥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시간을 지혜롭게 활용해야 한다.


머무를 시간은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최대한 효율적으로, 그리고 우아하게.

그리고 다시 내가 마주해야 할 현실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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